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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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4.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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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윤 (경남복지정책연구원 이사)
내가 아는 그니는 작은 도시에서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장터를 돌며 커피를 파는 아줌마다. 예전에 은행원이던 남편이 IMF를 겪으며 명퇴하고, 그 명퇴금으로 괜찮은 식당을 운영할 때만 해도 말끔하고 세련된 미시였다. 그런데 사장사모님 호칭은 오래가지 못했다. 퇴직금과 대출로 큼직하게 시작했던 식당은 주방장과 종업원들 먹여 살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사장인 남편은 꼬박꼬박 돌아오는 월세 맞추느라 편한 날 없는 이름뿐인 사장이었고, 결국 오래되지 않아 파산한다고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후 서로에 대한 불신과 빚만 남은 상태에서 부부싸움은 일과가 되었다. 물론 남편은 하루도 술을 거르지 않았고,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까지 피워 댔다.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던 이 부부는 집을 정리하고 지인이 오래 비워둔 폐가나 다름없는 주택을 대충 손본 후 거처로 삼았다.

하루하루 시간만 축내던 어느 날, 낡을 대로 낡은 화장실의 변기가 막히는 사고가 생겼다. 수리를 위해 사람을 부르는 것조차 부담이 된 남편이 낑낑대며 변기를 수리하더니, 어설프게 고친 그 변기에서 무언가를 찾은 듯했다. 평생 은행업무 밖에 몰랐던 사람이 본인 손을 거쳐 변기가 작동되자 밑천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후 길가의 전주에 막힌 변기를 뚫는다고 전단지를 붙이고 다니는 남편이 얄밉고 덜 미더워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던 그니가 그나마 마음을 열어 도움을 준 것은 수리요청이 오는 전화를 받아주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출장 수리를 나간 남편의 실수로 오물이 역류하여 의뢰인의 온갖 구박과 탓을 듣던 남편을 우연히 보았다. 남편이 알까봐 내색도 못하고 저녁 내내 운 그니는 뒷날 떠오르는 햇살과 함께 자세가 바뀌었다. 부끄러워 생각도 못했던 출장 수리길에 적극적으로 따라 나가 보조하고, 틈틈이 광고 전단지를 붙이러 다니고 일거리를 받아오기도 했다.

또 5일장이 서는 장날에는 작은 구루마를 끌고 나가 커피나 음료를 파는 억척도 부렸다. 이젠 환경이 좀 좋아졌는데도 그니는 그 어려웠던 때를 잊지 않는다. 장이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구루마를 끌고 장으로 나가 힘들 때 의지가 되었던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이어간다. 그리고 여전히 5일마다 커피를 팔며 그 수익금을 모아 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서는 데 필요한 종잣돈으로 쓰라고 건넨다. ‘안 해도 된다고 해도 자꾸 도와 준다면서~.’

집안일을 많이 도와주는 남편이 주부 습진에 걸렸다며 약 사러 나온 그니는 은근히 남편 자랑을 한다. 웃는 얼굴 주름 사이에 행복이 켜켜이 새겨져 아름답다.

이서윤 (경남복지정책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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