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등로(登路)주의
정치 등로(登路)주의
  • 경남일보
  • 승인 2014.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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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객원논설위원, 진주교대 교수)
정치는 히말라야 등정기 이상의 다큐멘터리다. 다양한 소재로 구성되는 정치세계의 다큐멘터리를 등산세계로 접목하자면 산악인들이 자주 쓰는 말로 ‘등정(登頂)주의’와 ‘등로(登路)주의’가 있다. 산악계의 오래된 논쟁이다. ‘극지법 등반’을 가리키는 등정주의는 주로 정상 정복에 중요한 의미를 두는 반면, 등로주의는 ‘알파인 스타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보다는 어떤 길로, 어떤 방식으로 올라갔는가 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머메리즘’(mummerism)이라고 부르는 ‘등로주의’는 그것의 창시자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 1855∼1895)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체로 등로주의자들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고 남이 이미 개척한 루트를 따라 산의 정상에 오르는 등정주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이미 나 있는 길을 따라 히말라야에 오르는 것이라면 셰르파(Sherpa)를 능가할 산악인은 없기 때문이다.



현실정치, 등로주의 정신 되새겨야

머메리의 정신은 무산소 등정이나 단독 등정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산악계의 흐름은 ‘등정주의’에 치우쳐 있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이나 세계 7대륙 최고봉, 3극점 등정 ‘산악 그랜드슬램’ 혹은 ‘세계 최초’라는 강박 관념은 등정주의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세계적인 권위를 갖는 유럽 고산등반협회와 프랑스 산악 전문지 ‘몽 타뉴’가 매년 수여하는 ‘황금 피켈상’ 후보 조건은 ‘셰르파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고정 로프를 사용하지 않으며, 얼마나 적은 인원으로 등정했느냐, 무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산소를 따로 공급받지 않는 것’ 등을 기준으로 수상자를 가린다. 결국 등정주의는 결과중심주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상 정복을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등로주의는 더 위험하고, 더 힘들고,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코스를 선택한다.

대통령 정치행로를 등산에 비유한 유머가 있다. 민둥산 등반에 비유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지루하고 긴 등반인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동행 등산객이 모두 떠난 경무대에서 홀로 하야를 하고, 장면 내각은 등산 배낭 꾸리다가 여의치 않아 등산도 못해본 상황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산 정상에 너무 오래 있다가 하산 시간을 넘겨 버린 경우다. 전두환 대통령은 내려오는 제 시간에 맞추어 내려오기는 했지만, 내려오는 길에 산악회 회비를 문제로 수난의 시간을 가진다. 노태우 대통령은 등산하면서 회원들과 물을 너무 많이 찾은 경우다. 김영삼 대통령은 머리는 빌릴 수 있으나 건강은 빌릴 수 없다며 산악회를 만들어서 등산을 했지만 배낭을 잃어버려 회원들이 IMF로 고통스러웠다. 김대중 대통령은 잃어버린 배낭, IMF 구제금융을 위해 열심히 찾아다닌다. 그리고 비유를 하자면 세계 산악연맹으로부터 최고의 명예인 산악인 상,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이렇게 정치는 등산행태로 설명될 수 있다.

등로주의와 등정주의 논쟁은 최근 우리 정치에 기초단체 정당공천제 존폐문제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여당과 야당은 물론 유력 대선주자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기초단체 무공천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중앙정치의 간섭을 막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킨다는 게 주요 이유였다. 또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기초단체 무공천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무공천이 약속을 지키는 정치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해오다 결국은 여야 모두 다시 입장을 바꾼다. 논리의 문제로 정당이 공천을 하지 않는 것은 헌법에서 규정하는 정당주의 국가에 반함이 있을 수 있고, 또 국민과의 약속이므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공약은 기득권 내려놓기, 정치혁신 차원에서 논의된 사항들이었다.



정치 등로주의, 현실 접목 여부 찾아야

기초단체 정당공천제 존폐 논의는 우리 정치가 집권이라는 등정주의에서 정치과정의 민주화를 의도하는 정치 등로주의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다. 등로주의 정신을 우리 현실정치에의 접목 여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상’이 아니라 과정 하나하나인 ‘루트’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재현 (객원논설위원, 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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