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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초록 속에 세월 간직한 절집(53) 운흥사에서 향로봉을 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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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5.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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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흥사
운흥사


산야가 마음껏 푸르렀다. 그래도 연두색의 여린 티가 어딘가에 남아있어 부드러움의 여유까지 한껏 머금고 싱그럽게 부풀어 가고 있다. 그래서 신록의 계절이라며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가? 아카시아 꽃내음이 창문으로 넘어들어 거실이 그윽하다. 베란다 바깥의 먼 산을 쳐다보다 또다시 무직한 게 가슴을 치받으며 목에 메인다. 한숨이 절로 나고 미안한 생각만 밀려든다. 밥상머리에 앉아도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푸른 산이 보여서 미안하고 꽃내음이 향긋해서 미안하고 밥상 앞에 앉아서 미안하다. 그래도 벅수 입에 소금 퍼서 넣듯이 꾸역꾸역 밥숟갈을 떠 넣다가 더는 말고 얼른 털고 일어나 주섬주섬 챙겨서 길을 나섰다.

운흥사에 들여서 사명당 송운대사의 장삼그림자도 잡고 싶고 이충무공의 추상같은 꾸지람이라도 듣고 싶어 영가천도의 영산전에 들려 향이라도 사르고 천진암과 낙서암을 거쳐 향로봉을 오르면서 묵은 땀이라도 실컷 흘려야겠다싶어 곧장 삼천포를 향해 길머리를 잡았다. 삼천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고성군 상리면으로 이어지는 1016번 도로를 따라서 5km남짓 가다가 봉현삼거리에서 운흥사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을 하였더니 이내 하이저수지에 부엉산 쌍봉이 수면에 반사되어 대칭된 모습으로 풍광의 멋을 낸다.



낙서암
낙서암


저수지 끄트머리에서 비스듬하게 운흥사 들머리로 접어들자 포장도로만 간신히 내어주고 고산준봉이 좌우로 조여들며 코앞까지 막아선다.

운흥사주차장에 닿으니까 초파일에 달았던 봉축연등이 양편으로 줄을 지워 길안내를 하는 데 웬 건물이 저리도 큰 게 섰나 했더니 농짝 같은 자연석으로 옹벽과 축을 쌓고 맞배집의 2층 누각이 육중한 주춧돌과 부도 모양의 석주위에 올려 세운 우람한 나무기둥부터 위압감이 누르는데 정면 일곱 칸에 측면 세 칸의 웅장한 건물이 출입문인 문루를 겸한 보제루인데 아직은 하단의 돌계단이 완공되지 않았지만 안마당으로 올라서는 석축의 계단은 말쑥하게 단장이 되었다.

보제루의 돌계단을 밟고 안마당으로 오르자 또 한 단의 높다란 석축위로 겹처마맞배집의 커다란 대웅전이 굽어보고 앉았다. 마당 오른쪽으로 명부전이 앉았고 대웅전 축대 뒤로는 산신각과 영산전이 높이 앉아 안마당의 축대를 걸터앉은 2층 범종각과 요사채를 굽어보며 청량한 풍경소리로 산사의 고요함을 더욱 짙게 한다.

농짝 같은 크기로 화강암 석축을 새로이 정비하고 토목공사의 흙냄새가 사방에서 풍기기는 하나 대웅전과 명부전이 고색이 창연하고 영산전과 산신각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세월의 때가 묻어 역사의 숨결이 들리는듯하여 당우 모퉁이 어딘가에서 승병들의 행렬이 몰려 올 것 같은데 사명당의 훈령소리도 이 충무공의 군령소리도 사백여년의 역사 속으로 멀어져간 세월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남해바다
정상에서 바라본 남해바다


대웅전과 명부전에 예를 갖추고 영산전으로 들었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의 정감과는 하나같이 판이하다. 불단도 불상도 단청의 채색까지 온통 세월의 때가 묻어 긴긴 시간이 멈춰버린 과거 속으로 파묻혀버린다. 대웅전 본존삼불 사이에 “왕비전하수제년 세자저하수천추”라고 새긴 왕비와 세자의 천수강녕을 기원하는 목제조각패가 섰는데 어느 분의 지칭인지는 알 수 없으나 676년 의상대사의 창건 이후, 임진왜란 때에는 승군의 본거지로서 사명대사의 휘하 6000여명의 승군이 주둔했으며, 이충무공은 수륙양면작전을 논의했던 호국의 사찰이었고, 이후엔 불화를 그리는 화원이었던 천년고찰의 역사의 향기는 불단에서부터 천정의 구조와 불상과 벽면의 탱화까지 예사롭지 않다. 대웅전 수미단과 닫집의 꾸밈새는 정교하면서도 간결하고, 명부전의 십대제왕상은 근엄한 표정이 살아있는 실물 같아 착각을 일게 한다. 보물 제1317호인 괘불탱은 매년 음력 삼월삼짇날에 영산재에서만 친견할 수 있을 뿐 본존불 뒤로 괘불 궤에 모셔져 볼 수는 없으나 후불탱화도 범상치는 않거니와 벽면에 걸린 탱화도 웬만한 사찰의 괘불탱과도 같이 크기도 크거니와 문외한이 구경꺼리로 보아도 이내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게 하는 불력이 풍겨 난다. 예를 갖춘 후에도 손 모아서 몇 번이고 꾸벅거리고 영산전과 명부전에 향을 사르며 진도 앞 깊은 바다 속으로 못다 핀 저들을 어리석게도 속절없이 보냈던 죄업을 뉘우치며 극락왕생만을 빌고 빌었다.

운흥사를 나와 암반으로 바닥을 깔고 층을 지어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활엽수가 하늘을 덮어버린 계곡을 따라 잠시 걸으면 두 갈래의 계곡이 맞모인 사이에 기왓장을 엎어 포갠 울타리를 두른 산중암자가 나온다. 딱따구리의 나무 찍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그림같이 한적한 천진암이다. 산승은 흔적 없고 공양주가 반기신다. 석간수를 한 쪽박 퍼서 주며 땀도 씻고 업도 씻으란다. 법명을 물었더니 ‘성각심’이라 일러주며 복 받을라 빌지 말고 복 짓고 살면서 무병건강 하라신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합장으로 답례하고 신발 끈을 조여 맸다. 예서부터 가파른 산길을 한참을 걸어야 했다. 도토리나무와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간간이 단풍나무가 딴 색으로 덧칠을 한다. 물 한 병 김밥 한 줄의 배낭이 버거워 질 무렵 검은 기와지붕의 용마루가 숲속의 높은 골짜기에서 어른거렸다. 아람을 넘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곳곳에서 계곡을 뒤덮은 틈새에서 깎아지른 수직의 절벽이 층을 지은 턱받이에 여염집 대문 같은 일주문을 세워 놓고 낙서암은 계곡을 굽어보며 호젓하게 앉았다. 들머리의 방 두 칸이 객실이고 법당 본채는 좌우 한 칸씩을 돌출시킨 팔작지붕의 균형 잡힌 목조건물로서 낙서암이라는 편액을 달고 산중암자 치고는 당당한 모습이다. 법당 뒤로 절벽을 등지고 앉은 작은 산신각이 땀에 젖은 외로운 객을 기다리고 있어 헌향삼배의 예를 갖추고 뜨락으로 내려서니 산승은 화단에서 오가피 순을 딴다. 점심반찬거리를 장만하고 있다며 낙서암 편액은 쌍계사 방장 고산 큰스님께서 쓰셨는데 아미타불의 또 다른 존호가 ‘낙서’라고 일러준다. 맨 몸으로 걷기도 힘겨운 산길인데 식자재의 운반인들 제대로 할까싶다.

무슨 업보 그리 많아 천륜 끊고 인륜 끊어/ 부모형제 이별하고 심산 절집 찾아들어/ 먹장삼에 삭발하고 천번만번 절하면서/ 염불하며 날 새우고 목탁 치며 밤새우며/ 참선수행 용맹정진 주야장천 면벽해도/ 백팔번뇌 해탈득도 성불하긴 요원하고/ 무상법계 색즉시공 공즉시색 인생무상/ 천상천하 유아독존 제 한 몸이나 건사하지/ 부실한 끼니가 안 보아도 아미타불!

부처님 들으시면 불호령 떨어질게고 서둘러서 향로봉으로 오르는 산길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하나 같이 면과 모서리가 반듯하고 날이 선 육면체이다. 까마귀 바위라는 새바위도 그렇고 상두바위, 조망바위, 평바위도 그렇다. 퇴적층이 촘촘하게 켜켜이 쌓여서 수평으로 가지런한 층을 지운 육면체의 바위들이다. 위로 쳐다보면 수직으로 곧추선 커다란 암벽이 연방이라도 넘어져 덮칠 것 같고 간신히 피해서 지나가면 코가 닿을 듯이 길은 가팔라져서 끙끙대며 오르면 좀 전에 덮칠 것 같은 수직의 절벽 위로 올라서게 되어 수 십길의 아찔한 낭떠러지가 발끝을 저리게 하는데 관목 숲이 우거저서 그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수목은 울창하여 산새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건만 여느 때 같으면 대자연이 내는 온갖 소리가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스펙터클한 주악과도 같이 들리려만 산바람 소리마저 애끓는 한숨소리로 들리어진다.

이름모를 산새가 쪼르르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더니만 홀로 걷는 외로운 객의 심사를 위로라도 하는 듯이 꼬리 끝을 쫑긋거리며 나뭇가지를 몇 차례 옮겨가며 앞장을 서더니만 이내 삐졌는지 푸르르 날아서 자취를 감춘다. 주홍색 철다리의 애향교를 건너서 579m 의 향로봉 정상에 닿아 땀을 식혔다.

멀리 나직하게 내려앉은 크고 작은 섬들이 사량도를 에워싸고 희끄무레한 바닷물에 잠기어 봉긋봉긋하게 머리만 내밀었다. 희뿌연 연무 속에 주홍색의 아치형 삼천포-창선대교가 희미하게 아련한데 오늘따라 왜 이리도 김밥 한 줄이 목이 메이는지….

까악! 까악! 울어대는 까마귀를 향해 휘-익 하니 던져버리고 먼 바다를 허망이 바라본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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