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길 따라 꿈결처럼 자연 속으로
왕의 길 따라 꿈결처럼 자연 속으로
  • 최창민
  • 승인 2014.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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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터전, 지리산 둘레길 <2>하동호~서당마을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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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광발전소와 소수력발전소.


‘해질 무렵 경천묘 경내는 적막하기만 할 뿐 신라 천년사직을 넘긴 경순왕의 비애와 마의태자의 애끓는 울부짖음은 찾을 길이 없는데…’ 1992년 당시 상이초등학교 하복도 교장은 ‘청암지’를 펴내면서 하동 청암의 경천묘에 대해 이같이 적었다.

국운이 쇠락해진 신라는 고려와 후백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명멸해갔다. 신라 마지막 군주 경순왕(? ~ 978)은 결국 국권을 고려에 넘기고 강원도 원주 용화산에서 생을 마친다. 훗날 사람들은 비통해 하며 간 그를 기리는 사당을 건립하고 그의 영정을 모셨다.

놀랍게도 경순왕의 영정이 둘레길 11코스가 지나는 하동 청암면 금남사 경천묘에 있다. 어떻게 왕의 영정이 강원도에서 멀고 먼 길을 떠나 하동 청암에 흘러들어 왔을까.

원래 영정과 경천묘는 왕이 여생을 보낸 원주 용화산에 있었다. 그로부터 400년 후 성리학의 대가인 목은 이색(1328∼1396)과 양촌 권근(1352∼1409)이 제를 올리고 모셨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묘우가 무너져 크게 훼손됐다. 한때 경주 숭혜전으로 옮겨지기도 했으나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호남 유림들이 후손들의 뜻을 받아들여 1903년, 청암에 모실 것을 관찰사에 건의한다.

경남관찰사 민형식은 이를 가상케 여겨 ‘시행하라’는 훈령을 내린다. ‘왕의 영정을 옮길 때 길을 열고 호송 예를 잘 갖추라. 경북관찰부에 협조도 구해주겠다’고 한뒤 ‘수렛꾼 4명, 의장용 양산잡이 1명, 길잡이 2명, 풍악꾼 삼현육각 등잡이를 대기케 하라’고 지시한다.

이기택 편찬 ‘대동문헌보감’에 ‘영호남 유생들이 올리는 글’과 ‘훈령’에 기록된 내용이다. 관찰사가 왕의 영정을 모시는 것에 대해 세심한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뒤이어 1904년 경순왕의 후손 김성행과 정광용이 묘우를 건립하고 영정은 호송절차를 거쳐 청암으로 오게된다. 목은 이색의 영정은 2년 뒤 청암의 금남사 창건과 함께 모신 것으로 추측된다.

지리산 둘레길 하동호∼삼화실 구간 일부는 이를테면 경순왕의 영정 길, 왕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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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승
▲하동호∼삼화실구간은 ‘지리산 둘레길 11코스’에 해당한다. 총길이 9.3km이지만 12코스인 삼화실∼대축코스가 긴 관계로 삼화실에서 3.5km를 더 이동해 서당마을에서 걷기산행을 마치기로 했다. 따라서 이번 코스는 하동호에서 서당마을까지 12.8km에 휴식 포함 6시간이 소요된다. 하동호→청암체육공원→평촌(경천묘)→화월→관점→상존티→존티재→삼화실(동촌마을)→버디재→서당마을.

▲오전 8시 35분, 하동호관리소에서 이정표 빨강화살표 방향 평촌마을을 따른다. 하동댐 사면으로 둘레길이 열려 있다. 댐 아래 광장에 하동지구태양광발전소, 물 건너 언덕배기에 하동호소수력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다.

태양광발전소는 2008년 17억5000만원을 들여 완공했고 발전량 299MWh인데 10년을 사용해야 본전이 나온다고 한다.

소수력발전소는 2004년 말 20여억원을 들여 건립했으며 시간당 825 ㎾규모의 발전시설용량이다. 하동호에서 떨어지는 100여m 높이의 물의 낙차를 이용해 연간 272만2000㎾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태양과 물을 이용한 친환경적인 발전소로 둘레길에 어울리는 시설이라는 생각인데 발전용량이 기대치를 충족하는지는 의문이다.

둘레길은 교량 아래를 지나간다. 청암천 변 둑길과 매실나무단지에는 풍년을 예고하는 이팝나무가 특유의 타래꽃을 피워냈고 매실나무는 청포도처럼 다닥다닥 달려 있으며 풀섶엔 둥글레 머위 달래가 풍성하게 자라 초록의 싱그러움이 넘친다.

오전 9시5분, 청암면 소재지인 평촌마을에는 면사무소를 비롯해 치안센터, 보건소, 우체국이 몰려 있다. 서예가인 하태현 우체국장의 배려로 차 한잔의 여유와 직원들의 친절, 미소를 가슴에 안는다.

금남사와 경천묘는 평촌마을 골목 100여m 안쪽에 있다. 경순왕의 영정 외에도 고려 말 3은 중 한사람인 목은 이색의 영정(경남유형문화재)이 있다. 1404년에 처음 제작됐으나 훼손되자 1766년 원래 것을 바탕으로 다시 그린 것이다.

강원도 원주의 용화산에서 1906년 청암 중이리 신기마을 금남사 경모당으로 옮긴 뒤 1988년 하동호 건설로 인한 수몰로 다시 이곳으로 왔다. 안타깝게도 이 영정은 2006년 도난 당해 지금 것은 이모(移模)한 것이다.

둘레길은 평촌에서 1003번 도로를 따라 함박골까지 간뒤 오른쪽 하우스단지를 지나 청암천을 건넌다. 향수 자극하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깨끗한 물속에 노니는 피라미를 돌다리에서 보는 것도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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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에서 상존티로 넘어가는 이름없는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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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


강변 둑방길을 따라 걷다가 화월마을로 올라선다. 300년 수령의 벚나무 당산목이 자랑인 화월은 함박골(함화)과 버드리(반월)를 합한 것이다. 두마을 각 한자씩 따 화월이다. 화월 지나 재차 청암천 건너 관점마을에 올라선다. 옛날엔 갓점이라 불렀다.

오전 10시, 관점마을회관. 사단법인 ‘숲길’에서 세운 9구간 이정표에 하동호∼삼화실 구간의 개략을 기록해 놓았다. ‘호수길 개울길 대나무 숲길 등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 즐겁게 한다. 돌다리도 건너고 산골 아이들이 학교를 다녔던 고갯길도 걷는다’고 돼 있다. 이 구간에 없는 궁항마을 얘기는 누군가의 실수인 듯하다.

관점에서 상존티로 넘어가는 재에서 취재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족히 1m가 돼 보이는 황구렁이가 길바닥을 기어가는 것이 아닌가. 뱀의 크기와 포스에 눌린 것도 있지만 파충류에 대한 거부반응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회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건너편 하존티를 구경삼아 명사길을 따라 상존티로 향한다.

오전 11시, 명사마을회관 앞으로 대숲을 지나고 존티재 방향. 한바탕 토종 대나무의 잔치가 펼쳐진다. 대나무는 오래 전 소쿠리나 키 죽예품 등 여러모로 유용하게 쓰여 상전대접을 받았으나 지금은 하릴없이 몸뚱이만 키우고 있다.

존티재 먼당에 버티고 선 한쌍의 목장승, 둘레길 조성 시 세웠는데 지하여장군이 길게 내민 혓바닥이 해학을 넘어 섬뜩하다. 달뜨고 야심한 밤에 이 고개를 넘는 나그네가 있다면 머리카락 곧추 설 일이다.

낮 12시, 동촌마을까지는 30여분이 소요된다. 화려하고 예쁜 집은 ‘2007년 하동군 선정 우수주택’이다. 넓은 정원에 국산잔디를 깔았고 경사진 지형을 살린 언덕배기에 황토빛깔의 벽체 위로 기와를 얹었다.

둘레길 삼화실안내소는 삼화초등학교가 있던 자리. 안내소 기능 외에도 삼화에코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방문객의 쉼터와 숙소로 활용하고 있다. 삼화초등학교는 1938년 간이학교를 시작으로 1972년 삼화교 명사분교, 1978년 청암교 명사분교, 1994년 적량교에 편입된 뒤 1999년 이후 폐교됐다. 질곡의 60여년 동안 2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2012년 이 학교 총동창회가 ‘차마 잊혀질까 흔적을 남긴다’며 이정석을 세웠다. 삼화실은 배꽃 복숭아꽃 오얏꽃이 피는 마을에서 유래된 예쁜 이름이다.

에코하우스 직원이 나와 반겨주었으며 코스 안내도 해주었다. 현수막에 ‘둘레꾼을 가장해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접근해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며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안내 글이 있다.

오후 1시19분, 점심과 휴식 후 자리를 뜬다. 둘레길은 이정마을 안길을 관통한 뒤 두그루 정자나무를 지나 다시 논길사이로 간다. 골프용어와 같은 버디재를 넘어가면 서당마을이 숲아래 빼꼼하다. 서당마을 뒷산에는 주민들이 각종 산나물과 고사리를 재배하고 있다.

산에서 마을의 집까지 연결한 와이어는 고사리를 보다 손쉽게 운반하기 위한 수단. 고사리를 담은 바구니를 줄에 매달아 하산시키는 시설, ‘고사리 케이블카’라 할까.

오후 2시33분, 2번국도 하동 적량에서 곁가지 친 적량로를 만나 서당마을회관에서 산행이 종료된다. 둘레길은 신촌마을로 향하고 다른 한길은 읍 소재 지리산둘레길 하동센터로 간다.

산행 후 집에서 배낭을 풀던 중 또 한번 놀랐다. 갑자기 도마뱀 한마리가 배낭에서 기어 나와 거실을 활개치며 돌아다녔다. 엉겁결에 화장지를 잔뜩 말아 포획했지만 찰나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생각해보니 삼화실 어귀에서 점심을 먹을 때 배낭 속으로 기어들어 갔었던 모양이다. 뒷날 도마뱀은 숲으로 돌아갔다.

최창민·강동현기자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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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의 잔치가 펼쳐지는 상존티∼존티재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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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실안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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