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문화, 경남의 자랑> 제4의 제국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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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용
  • 승인 2014.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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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시조 수로왕과 허황옥을 만나다

수로왕영정
수로왕 영정
허황옥왕후영정
허황옥왕후 영정


육가야(六伽倻)의 하나로서 김 수로왕(金首露王)이 서기 42년에 김해를 수도로 세운 나라. 10대 마지막 왕 구형왕을 끝으로 491년 만에 멸망했다. 그러나 멸망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하나는 서기 5세기 초반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 때 사실상 멸망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 법흥왕 19년인 532년에 멸망했다는 것이다. 또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신라 진흥왕 23년인 서기 562년에 멸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구지봉2
구지봉 전경. 우측 상단부 멀리 허황후릉이 보인다.


◇구지봉(龜旨峯)

구지봉은 국가사적 제429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에 따르면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탄강(誕降)했고, 아도간과 유천간 등 9간과 백성들의 추대에 의해 가락국의 왕이 되었다는 가야건국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또 구지봉에서 구간과 백성들이 수로왕을 맞기 위해 춤을 추며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로 고대 국문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상부에는 B.C 4세기경 남방식 지석묘가 있어 그 역사성을 나타내고 있다. 지석묘 상석에는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구지봉은 거북을 닮았다. 그래서 구봉(龜峯) 또는 구수봉(龜首峯) 등으로도 불린다. 거북이의 머리에 해당되는 부분이 오늘날 구지봉이다. 거북이의 몸통에는 수로왕비릉이 자리 잡고 있다.

거북이 형상의 구릉 앞쪽 해반천 건너편에는 연지공원이 있다. 원래 이 곳에는 순지(蓴池)라는 연못이 있었다. 풍수학자들은 거북이가 물을 마시러 가는 지형으로 보고 아주 뛰어난 길지로 여겼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지도 ‘김해부내지도(金海府內地圖)’에는 거북의 목에 해당되는 부분의 고갯길을 넘지 않고 불편하지만 구지봉 앞쪽으로 돌아서 다니도록 한 도로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 아무런 해침도 없이 잘 보존되던 구지봉은 일제강점기 때 무참히 붕괴됐다. 민족정기를 끊으려한 간악한 의도로 인해 불행히도 거북이의 목 부분이 잘리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당시 일제는 신작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옛길을 없애고 거북이 목을 잘라내어 도로를 직선화시켰다.

원래 경상남도 기념물이었던 구지봉은 김해시가 가야역사문화 환경정비 사업을 시행하면서 지난 2001년 3월 국가사적으로 승격됐다.



◇수로왕릉(首露王陵)

수로왕릉은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이다. 납릉(納陵)이라고도 부른다. 국가사적 제73호다. 김해와 가야문화의 상징적인 문화재다. 600만 김해김씨·허씨, 인천이씨의 성지이기도 하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이다. 주위 1만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 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에는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芝峰類洩)’기록에 따르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지봉석
한석봉 필체로 새겨진 구지봉석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수로왕비릉은 김해시내 북단인 구산동, 즉 분산(盆山)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있다. 사적 제74호다. 동쪽 100m 지점에는 구산동 고분군이 있다.

능은 높이 5m 정도의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의 밑 부분에 특별한 시설은 없다. 무덤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4각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 쪽에는 긴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앙에 세워진 비석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는 글이 2줄로 새겨져 있다.

무덤에 딸린 부속건물은 숭보제와 외삼문·내삼문·홍살문이 있다. 보통 평지에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탑의 석재가 남아 있다.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졌다.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비석과 상석 등은 인조 25년(1641)에 다시 정비하면서 설치됐다. 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소박한 편이다.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으므로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토광묘) 또는 돌덧널무덤(석곽묘)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의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이다. 원래 인도 아유타의 공주로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됐다. 10명의 왕자를 낳았다. 그 중 2명에게 왕비의 성인 허씨 성을 이어서 지금도 그 후손이 번성하고 있다.



수로왕릉
수로왕릉 전경
왕비릉전경
허황후릉 전경
◇재조명되는 김수로와 허황옥

수로왕은 서기 42년 구지봉에 탄강했다. 48년 아유타국 출신의 16세 허황옥 공주와 혼인했다. 10남 2녀를 낳고 199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수로왕릉 앞 납릉정문에는 아유타국 왕실문장인 쌍어문과 수로왕후 허황옥이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 모양의 탑과 코끼리상, 불교전래를 전하는 연꽃문양 등이 아직도 남아 있어 흥미를 더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12년에는 봉황동유적 남동쪽에서 수로왕비가 타고 왔다고 가락국기에 전하는 배와 비슷한 크기의 선박파편이 발굴됐다. 수로왕비가 인도든 중국이든 해외에서 배로 타고 온 것은 맞는 것 같다.

예전에는 수로왕 존재 자체의 설화성과 다른 고분군과 떨어진 왕릉의 위치, 저습지란 점 등 이유 때문에 학계에서는 수로왕릉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하는 분위기도 팽배했다.

그러나 최근 왕릉 서쪽에 연접한 수릉원 부지에서 2세기경의 지배자 무덤이 발굴되고 또 왕릉 바로 북쪽에 고인돌 2기가 존재하고 있어 이 지역이 충분히 무덤이 들어설 수 있는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음이 증명됐다.

현재의 수로왕릉은 통일신라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보수·정비돼 왔다. 그래서 왕릉의 석물들은 조선시대의 왕릉양식으로 새롭게 조성됐다. 제례 또한 유교식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원래 능 앞에 있어야 할 장명등이 숭정각(영정각) 앞으로 잘못 옮겨져 있고, 문·무신상 뒤에서 사람을 태워야 할 석마(石馬)는 양과 호랑이와 함께 석인들과 나란히 서 있다. 물론 호랑이상도 외부를 보고 능을 수호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수로왕릉은 이천여 년의 시간에 걸맞게 많은 외형적 변화를 거쳐 온 것만은 틀림이 없는 듯 하다. 여기에다 수로왕릉은 임진왜란 때 일부 도굴이 됐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2000년 가까이 보존되어온 김해의 상징적인 문화재다. 봄, 가을로 수천 명의 후손들이 모여 제례를 지낸다. 해마다 2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수로왕릉을 찾는다. 가야문화의 정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수로왕은 2000년 전 고대의 다른 왕들처럼 정복이나 무력이 아닌 백성들이 추대로 왕이 됐다. 수로왕은 또 탄강한 다른 형제들과 함께 6개의 나라(6가야)로 나누어 다스렸다. 지방분권의 시초였던 셈이다.

특히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맞아 최초의 국제결혼을 한 커플이 됐다. 수로왕은 열 아들 가운데 두 명은 어머니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면서 양성평등의 기틀도 마련했다. 그러면서 수로왕은 첨단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인종과 국경을 넘어 500년 왕국의 기틀을 세웠다.

김해/한용기자 yong@gnnews.co.kr

사진·자료제공/김해시·문화재청









파사석탑
파사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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