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본 듯한 길, 형제봉 줄기를 넘어서…
꿈에 본 듯한 길, 형제봉 줄기를 넘어서…
  • 최창민
  • 승인 2014.05.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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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터전, 지리산 둘레길 <4>대축마을 원부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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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천변 제방길


끊어질듯 굽이돌아 다시 이어지는 산길, 다 넘어온 것 같지만 아직 길은 남아서 빨리 오라 손짓 하는 오름길, 호흡은 가빠지고 허벅지, 장딴지에는 힘이 들어간다.

늙은 서어나무 이파리를 초록으로 물들이는 조화는 누구의 소행일까. 때죽나무 꽃을 별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는 어디에서 오는가. 휘파람 소리를 내는 산새들은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잠을 자는가. 또 저 산등성이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걸음을 재촉해 빨리 그곳으로 다가가고 싶은 충동이 불끈 불끈 솟아난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마음도 조급해진다. 이는 필시 하느님이 준비한 천상의 길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 산길 고스락엔 특별할 게 없다. 그저 산새 빠르게 날고, 키 작은 관목이 어우러져 있는 산일 뿐이다. 감동의 차이는 화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고스락을 뒤로 하고 돌아설 땐 뭔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아깝다. 이미 지나가버린 길을 뒤돌아보면 아깝고 아쉽다. 마치 어린아이가 한덩이 빵을 다 먹어 치워버린 허탈감이다. 이 느낌은 산을 다 내려갈 때까지 이어진다. 완주했다는 안도감보다는 ‘끝이 나버렸다’는 상실감이 더 크다. 이것이 지리산 둘레길이다. 어쩌면, 인생일지도 모른다.

이 구간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꿈에 본 듯한 길, 형제봉 줄기를 넘어서…’이다. 고스락 1115m 높이에서 고도를 낮춰 평사리 무딤이들로 잠영하는 중간, 고도 754m의 윗재를 넘어간다. 재 외에도 세 줄기의 등성을 더 넘은 뒤 왼쪽으로 꺾어 원부춘으로 떨어진다.

8.6km로 짧아도 산 너울 2∼3개를 넘기 때문에 방심하면 안 된다. 특히 입석에서 원부춘까지 3시간여는 오롯이 청량감이 충만한 산길이다. 앞서 대축에서 입석마을까지는 들판과 부부송 동정호를 지날 수 있고, 산기슭에는 최참판댁을 비롯해 옛 시골마을의 초가집 정취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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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리 부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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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송 앞에서 모내기를 준비하는 부부.
▲대축∼원부춘마을 구간은 지리산 둘레길 13코스에 해당한다. 8.6km에 휴식포함 5시간이 소요되며 난이도는 ‘중’이다.

대축마을→축지교→악양천둑길→부부송→동정호→최참판댁→입석마을→마당물 쉼터→윗재→다락논→원부춘. 악양천 둑길에서 오른쪽으로 입석마을이 정코스, 취재팀은 부부송과 동정호 최참판댁 거쳐 입석마을로 코스를 변경했다. 도착지 원부춘에서 출발지 대축마을(하동읍)까지 군내버스 이용이 가능하다.

▲오전 9시, 출발지 대축마을은 악양 축지리 무딤이들의 동남쪽 산에 기댄 마을이다. 둘레길은 마을 앞 악양동로와 축지교를 건너 무딤이들의 제방 위로 향한다. 축지교 아래에 흘러가는 물줄기는 형제봉에서 발원한 생명수, 악양천이며 사계절 무딤이들을 풍요롭게 적셔주는 젖줄이다.

축지교를 건너자마자 제방 좌우로 갈림길이다. 취재팀은 왼쪽 부부송 동정호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옅은 안개가 내려앉은 제방 길을 따라 1km정도 걸어가면 오른쪽 발밑 들녘에 한국농어촌공사 악양배수장이다. 악양들 수량을 조절한다.

평사리에는 이 시절 보리와 밀이 황금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부부송은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고 있는 명물로 하동 4대 소나무 중 하나다. 동정호는 악양과 함께 중국의 지명을 빌려왔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의미다.

들길에 나뒹구는 두더지는 어찌하여 죽었을까. 보도블록에 막혀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 동물의 생존공간이 세상 어디서든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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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에 메밀꽃이 핀 초가정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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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보기드문 두더지


아스팔트 악양서로 주변, 하동군에서 섬진강을 따라 조성한 또 다른 길, 박경리의 토지 길을 만난다. 소설 ‘토지’의 주 무대가 된 하동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가는 도보코스다. 평사리를 지나는 1코스와 19번 국도를 따라 꽃길을 걷는 2, 3코스 등 3개의 길이다. 코스 내내 섬진강이 길동무를 해주고 곳곳에 토지와 녹차에 얽힌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 길이다. 봄철 벚꽃은 국내 최고급이다.

취재팀은 악양서로를 버리고 최참판댁으로 오른다. 기념품 가게에 걸려 있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입은 말이 적게/ 마음은 성근일이 적게/ 밥이 적게 /잠을 적게/ 이 네가지만 실천하면 신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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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의 선이 아름다운 최참판댁 행랑채


최참판댁, 초가삼간, 물레방아, 마을 돌담길은 옛 정취 물씬 나는 풍경으로 박경리 선생의 무한상상이 그려낸 유토피아다. 메밀꽃과 초가, 돌담길을 덮어가는 마삭줄 담쟁이 풍경은 아무데나 포커스를 맞춰도 그림이 된다.

하동 8경에 평사리 최참판댁을 비롯해 화개장터, 십리 벚꽃길, 쌍계사의 가을, 형제봉 철쭉, 청학동 삼성궁, 지리산 불일폭포 등이 들어 있다.

일부 초가삼간에는 주민이 거주하는 곳도 있고 더러는 빈곳도 있다. 마구간에 덩치 큰 소 한마리가 버티고 있어 자세히 보니 마네킹 소, 그 즈음 다른 마구간의 황소는 ‘나는 진짜요’라는 듯 긴 혀를 날름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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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사고하는 것은 능동성의 근원이며 창조의 원천이다’ 영남의 최고 부자 최참판댁을 부활시킨 박경리 선생의 약력과 어록.

1926년 10월 통영에서 태어나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 김행도씨와 결혼했으나 5년 뒤 사별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 현대문학에 ‘계산’으로 데뷔했다.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 을 발표했고 1969년부터 소설 ‘토지’를 연재한다. 2008년 따뜻한 5월, 한국문단에 산같이 높고 넓은 족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한옥의 선이 아름다운 사랑채에 앉으면 평사리 들녘이 가슴에 안긴다. 길은 사랑채를 빠져 나와 토지전통시장 뒤편으로 연결된 뒤 야외 공연장 옆을 지난다. 이어 매실과수 사이 시멘트 길을 내려가 왼쪽 조씨 고가 방향으로 간다. 구렁논 사잇길을 내려선 뒤 올라서면 둘레길 대촌마을 이정표와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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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강아지


강아지 한 마리가 오두막에 버티고 앉아 주인행세를 하는 전원주택 옆을 지난다. 버릇없는 강아지인데 오히려 앙증맞고 귀엽다.

오전 10시30분, 입석마을, 이때부터 내리막을 찾아 볼 수 없는 산길, 오로지 된비알이다. 지금까지 사람의 흔적을 쫓았다면 이제부터는 산길이다. 보통의 산길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거친 숨소리 끝에 갖는 휴식, 숨소리 거칠어도 견딜만하고, 휴식은 달다.

산에는 특유의 하얀 껍질과 근육질을 자랑하는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7부 능선쯤에서 만나는 갈림길에선 오른쪽 방향이다.

오전 11시 30분, 숲길을 헤쳐 첫 고개에 닿는다. 형제봉에서 내려와 검두마을이나 고소성 방향으로 내려가는 산줄기다. 해발 600여m가 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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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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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내림길이지만 나무 사이 시선 위에 하늘보다 더 넓은 산그리메가 가로막는다. 산등성이를 또 넘어야 된다는 얘기다. 성문같이 선 두개의 바위사이를 지나고 30분을 더 진행해야 한다. 이 오름길은 2.4km를 남긴 지점에서 잦아들어 산등성이를 만난다.

곧추 선 길 20여분을 더 걸어 750여m까지 고도를 높인다. 그러고도 앞에 또 다른 산줄기가 보이지만, 그곳으로 향하지 않고 좌측으로 90도 이상 꺾어 떨어진다. 원부춘마을까지 1.9km 남은 지점이다.

낮 12시50분, 작은 개울이 있는 곳에 닿는다. 높은 고도 때문에 수량이 적어도 시원한 계곡 바람이 귓가에 스쳐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을 식혀준다.

1시간의 점심 겸 휴식, 산 속의 밤나무 재배농가의 농막을 지나, 고사리 수확이 끝난 다락논, 두렁을 타고 내려서면 ‘아침의 구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암자 조운사다. “공양하고 가시라”는 스님의 친절한 인사를 뒤로 하고 오후 1시50분, 원부춘마을에 닿는다.

최창민·강동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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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줄기 해발 700m지점 서어나무 군락지 사이를 오르고 있는 취재팀.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 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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