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땅이 맺은 결실이 싱그러운 이 길
척박한 땅이 맺은 결실이 싱그러운 이 길
  • 최창민
  • 승인 2014.06.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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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터전, 지리산 둘레길 <5>원부춘∼가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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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돌틈에서 자라는 화개골 왕의 녹차. 우전차, 천년녹차 등 전국 최고의 명차로 명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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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의 녹차, 정금차밭. 갈지자 화개천과 산신마을. 더 멀리 남도대교가 보인다.

위로는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산봉우리요, 발아래는 바다같이 뿌우연 수풀 뿐, 그 위에 흰 햇살만 물줄기처럼 내리 퍼붓고 있었다. 머루 다래 으름은 이제 겨우 파랗게 메아리 쳐 있고, 가지마다 새빨간 복분자, 오디는 오히려 철이 겨운 듯 한 머리 까맣게 먹물이 돌았다. 성기는 아가위나무 가지로 앞에서 칡덩굴을 헤쳐 가는데, 계연은 뒤에서, 두릅을 꺾는다, 딸기를 딴다, 하며 자꾸 혼자 처지곤 했다. “빨리 오잖고 뭘 하나?”

성기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나무라면 계연은 딸기를 따다 말고, 두릅을 꺾다 말고, 그 조그맣고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물고는 뛰어오는 것인데, 한참 가다 보면 또 뒤에 처지곤 하였다. “아이고머니 어쩔꺼나!” 갑자기 뒤에서 계연이 소리를 질렀다. 돌아다보니 떡갈나무 위에서, 가지에 치맛자락이 걸려 있다.<중략> 나무 아래서 쳐다보니 활짝 걷어 올려진 베치다 속에, 정강마루까지를 채 가루지 못한 짤막한 베고의가 훤한 햇살을 받아 그 안의 뽀오얀….

김동리의 단편 ‘역마(驛馬)’ 한 토막으로 화개장터에서 주막을 하던 옥화가 외아들 성기의 역마살을 잠재우기 위해 애쓰던 중 어느 날 굴러들어온 체장수의 딸 계연을 성기에게 붙여 칠불사로 책값수금을 가는데, 이미 갸름한 얼굴에 흰자위 검은자위가 꽃같이 선연한 눈이 예쁜 계연에게 꽂힌 성기가 녹음 가득한 아름다운 산속 깊은 곳에서 사랑을 느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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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만 덩그러니 서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절집.


▲원부춘∼가탄마을구간은 지리산 둘레길 14코스에 해당한다. 13.2km에 휴식 포함 6시간이 소요되며, 난이도는 ‘상’이다. 특히 중촌마을에서 하늘호수카페를 지나 형제봉 임도까지 거꾸로 오르는 구간은 길기도 할 뿐더러 급경사여서 여간 힘 드는 게 아니다. 원부춘→임도→지통골 형제봉방향→형제봉 임도갈림길→왼쪽 산길 사이길→하늘호수카페→중촌마을 →정금마을 차밭→ 대비마을→ 백혜마을 →가탄마을.

▲오전 9시, 원부춘을 출발한다. 아스팔트·시멘트임도는 넓지만 양옆으로 우거진 숲이 짙어 드문드문 그늘을 만든다. 둘레길 안내도에는 ‘폭염주의 구간’이라고 돼 있다.

5월의 끄트머리 햇살은 어깨죽지를 덥히고도 목덜미까지 따갑게 한다. 더위에 지쳐버렸는지 산새들의 인기척도 별로 없는데 물 건너온 양벌은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떼로 뭉쳐 웅웅 거리며 벌통 앞에서 춤을 춘다.

남쪽에서 강원도까지 꽃을 따라 먼 거리를 이동하며 꿀을 채집하는 양봉농가는 채취할 꽃꿀이 남은 것인지 미련이 남은 것인지 뜨지 못하고 둘레길 모롱이에 눌러앉은 모양새다. 모름지기 멸종한 토종벌 자리를 양봉이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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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벌을 대신하고 있는 물 건너온 양봉.


마을의 끝, 지통골 입구 갈림길에선 왼쪽 ‘형제봉 7km’ 이정표를 따른다. 먼발치 지은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절은 이름은 안보이고 대웅전만 덩그렇게 서 있다. 다시 형제봉 활공장 6.5km 이정표에서 왼쪽 길을 택한다.

산에 둘러싸인 독가 촌 앞 흑구 백구 2마리가 취재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컹∼컹’ 짖어 계곡을 울린다.

부춘마을 상수원인 물탱크를 지나면 길옆 군데군데 몽글 몽글 피운 함박꽃이 함박웃음으로 맞이한다. 함박나무 아래를 날아가는 것인지 뛰어가는 것인지 쏜살같이 사라지는 놈은 요즘 보기 드문 메추리. 식당과 술집에 메추리알이 그리 많아도 야생메추리를 보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가 된 세상이다.

오전 10시 35분, 형제봉 활공장 갈림길에 도착한다. 철제로 만든 차단시설을 넘어 3.5km 임도로 진행하면 형제봉 활공장이다.

취재팀은 철제차단시설 앞 갈림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200m정도 더 걸어가면 이번에는 왼쪽으로 떨어지는 산길이다. 해발 817m, 이 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임도를 따라 계속 진행하면 지리산 주릉을 볼 수 있지만 길은 산 아래로 급히 꺾어 떨어진다.

이제부터 사실상 산에서 큰 오름길은 없다. 다만 산 아래 차밭을 지난 뒤 정금마을에서 임도를 거슬러 대비암으로 오르는 구간은 힘들다.

산길로 접어들어 하늘호수 차밭까지 1시간 동안 줄기차게 내려간다. 활엽목의 초록 잎새가 성성해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밀림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특이한 것은 하산 길이 이상하리만큼 끝간 데 없이 밑으로 떨어진다. 출발지 원부춘마을이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거기서 또 임도를 타고 꾸준히 고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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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밭을 지나는 취재팀과 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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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추리가 보이나요.


오전 11시 35분, 하늘호수 차밭. 이 구간의 절반지점으로 해발 290m이다. 민박을 비롯해 차,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둘레꾼들의 쉼터다. 이정표에 ‘바람도 별빛도 쉬어가는 곳’이라고 씌어 있다.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 일부를 소개한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후덕한 인상이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 부부가 일행을 맞이한다. 오가는 사람들이 성가실 법도 한데 주인은 오히려 찬물 한 대야를 떠 내어주며 ‘탁족’을 권한다. 친절이 몸에 배인 사람들이다.

카페 하늘호수 차밭 쉼터에서도 20여분을 더 걸어 해발 190m까지 내려서면 도심마을. 마을의 윗언저리를 굽이 돌아 오름길의 끝 먼당에 서면 갑자기 가슴 뚫리는 정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멀리 ‘갈 지자’ 모양의 화개천이 굽이쳐 흐르고 섬진강인지 은빛이 반사되는 곳에 남도대교가 보인다. 계곡에 닿은 산 뿌리턱에 옹기종기 모인 민가는 화개골 삼신마을, 발길이 닿는 곳은 정금차밭이다. 이 화개천 상류쪽으로는 10리벚꽃길과 쌍계사와 칠불암이 줄지어 있다. 하동 화개골 일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차나무를 심은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1000여㏊에서 재배하고 있다. 지난 4월 말부터 이미 햇차를 수확하고 있다.

이 곳 주민들은 험하고 척박한 야산에서 자란 찻잎을 따 자연 건조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지리산의 정기를 담은 하동야생녹차는 맛과 향이 뛰어나 전국 최고의 차로 인정받고 있다. 우전(雨前)은 절기 상 곡우를 전후해 따는 햇차로 차중의 차로 꼽힌다. 또 정금리 도심다원에는 국내 최고의 차나무(경남도 기념물 제264호)가 있다. 수령 천년으로 최근까지 나무의 안전을 위해 한해 400g정도를 소량씩 수확해 했으나 3년 전 동해피해를 입어 고사위기에 있으며 올해도 찻잎을 피우지 못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이 차나무에서 생산된 녹차는 2007년 열린 하동 야생차문화축제에서 경매로 100g에 1300만 원에 판매돼 국내 최고가를 기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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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앵두.


최태경 하동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뿌리 일부분에 올해 맹아(새싹)가 돋아나 진딧물 등 병해충 관리와 영양제 공급, 차양막 설치 등으로 나무를 보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밭은 정금마을까지 드넓게 펼쳐져 있고 대비마을, 대비암까지 드센 비알이다. 흙길이면 좋겠으나 한낮 햇살을 받아 달궈진 아스팔트여서 길바닥에서 훅 훅 올라오는 열기가 취재팀을 곤혹스럽게 한다.

오후 1시 30분, 대비암부근에서 점심 겸 휴식 후 자리를 뜬다. 약간의 오름길이 있으나 이제부터는 고도를 낮추는 하산길이다. 1시간여를 산길, 임도, 마을길을 타고가면 이 구간 마지막 가탄마을에 닿는다.

성기와 계연의 사랑은 운명적 이별로 막을 내리지만, 이들의 무대가 된 화개동천 일대는 2012년 둘레길이 열렸다.

김동리는 화개에 대해 회포와 한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곳이라고 했다. 길과 물이 세 갈래로 뻗어 있으며 장이 서고 흩어지고를 반복하는 풍토 속에서 이별이 잦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역마살을 타고 난다고 했다.

둘레꾼이 본 하동 화개는 이제 그렇지가 않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한 높은 산봉우리, 발아래는 바다같이 뿌우연 숲이 울창하다. 이 계절이 한뼘 더 지나면 머루 다래 으름 메아리질 아름다운 산천이다.

최창민·강동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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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정원에 있는 샘물.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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