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끝에서 만난 운조루 칸칸마다 옛 사연들
길 끝에서 만난 운조루 칸칸마다 옛 사연들
  • 최창민
  • 승인 2014.06.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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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터저 지리산 둘레길 <7>송정마을~오미마을
20140614지리산둘레길 송정-오미마을7 (115)
둘레길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요샛말로 ‘가진 자의 의무’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초기 로마 사회에는 고위층들이 희생과 기부의 정신이 있었다. 이것이 의무이자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면서 경쟁적으로 이뤄졌다. 이런 현상은 조국에 전쟁이 났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이 나면 고위층 자녀부터 솔선수범해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이로 인해 전쟁희생으로 귀족이 크게 줄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제정 이후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고 발전의 역동성이 떨어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로마제국이 번성하며 유럽의 맹주를 유지할 수 있는 계기였다.

이후에도 영국의 고위층 자녀들이 다니는 이튼칼리지 출신 수천명이 전장에서 산화했고 영국 여왕의 아들 앤드루가 참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했다.

우리에게도 이와 유사한 의무와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부자가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 ‘타인도 열게하여 주위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 하라’ 는 뜻이다.

조선영조 때 류이주 선생이 구례 오미리에 지은 양반가옥 ‘운조루’ 안에는 쌀독이 하나 있다. 쌀독 아래에 구멍을 내고 마개에다 이런 글귀를 써 놓았다. 가난한 이웃들이 와서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가 먹을거리를 해결하라는 뜻이다.

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과 궤를 같이하는 우리 조상들의 나눔의 삶, 베품의 정신을 알려주는 예다.



▲송정∼오미마을 구간은 지리산둘레길 16코스에 해당한다. 거리 9.2km에 휴식포함 5시간 20분이 소요된다. 난이도 ‘중’이다.

구례 토지들녘을 비롯해 오미마을의 운조루가 볼거리다. 금환락지로 알려진 운조루 앞길은 아늑하고 정겹다. 9.2km로 거리가 짧고 시멘트길 숲속길 아스팔트길이 연이어져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둘레길의 묘미라고 이해하면 즐거운 길이다.

송정마을→석주계곡→석주관 갈림길→구례노인양로원→문수댐 아래→내죽마을→오미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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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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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56분, 송정마을 주변 도로 옆에서 곧바로 산의 능선을 하나 넘어야 한다.

취나물 등 산나물을 재배하는 산나물밭과 산막이 나오고 오름길의 끝에서 의승재를 만난다.

출발 후 1km지점에 불과하나 시간은 1시간이 걸릴 정도로 지루한 느낌이 든다. 재를 넘으면 휘튼치드가 발산되는 신선한 편백나무지대가 이어지는 내림길이다. 인공조림으로 30∼40년 된 수목들이며 나무사이로 실개천이 흘러간다.

출발 후 1.8km지점이며 이 물은 석주곡수와 합류한 뒤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석주곡수길은 바윗돌로 자연스럽게 연결한 산중 징검다리로 정겨울 뿐더러 최근 내린 비로 수량까지 많아 시원한 느낌이 든다.

계곡을 내려서면 남도 이순신 길 백의종군로 갈림길이 나온다. 산 아래 골짝을 따르면 900m지점에 석주관 칠의사 묘.

주변에 바윗돌이 쌓여 있지만 석주관 성터는 아니다. 이 일대가 칠의사 및 의병들이 왜군에 맞서 옥쇄 전투를 펼친 피의 전장이다.

오전 10시 7분, 숲속을 벗어나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검정빛의 소나무지대가 나온다. 최근에 발생한 산불로 거의 모든 소나무가 죽은 채 서 있다.

산불은 한순간의 실수로 수백년된 나무 수천그루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특히 소나무는 열에 약하기 때문에 살짝만 스쳐도 죽는 특징이 있다.

그런 중에도 검은 소나무 사이로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진홍빛 나리꽃을 피워내 지리산의 대지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불탄 소나무지대는 모롱이 2∼3개를 돌아서야 벗어날 수 있다.

송정마을 출발 후 2.9km에 닿았을 때 기둥하나로 세워진 오두막과 통나무벤치시설을 만난다. 섬진강 건너 유명사찰 사성암을 품고 있는 오산과 주변 산을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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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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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16코스의 특징은 비교적 많이 걷고 시간도 꽤 지났다고 생각하고 지나온 거리를 살펴보면 생각만큼 걷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특이한 곳이다.

하나의 기둥으로 된 오두막시설 전망대 앞에서 급히 방향을 꺾어 내려선다. 멀리 현대식 건축물 독가가 한채 보이지만 둘레 길은 그리로 향하지 않는다. 간혹 길을 잘못 드는 이가 있다고 하니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또 다시 육각정을 지난 뒤 과수원길 임도가 이어지고 멀리 강가에 섬진강 어류생태관이 보인다.

우리나라 5대 강 중 하나인 섬진강은 유일하게 1급수를 유지하며 깨끗한 자연환경과 강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환경적, 생태적, 생물 자원학적으로 보전가치가 높은 곳이다.

21세기 생물자원 보존과 자원화를 통한 유전자원 확보로 국가 경쟁력 제고와 필요환경과 생태 보존을 위한 시설물이다.

2007년 완공했다. 천연기념물이자 보호종인 수달과 각종 민물고기, 1.5m에 가까운 토종메기 쏘가리 자라 등이 전시돼 있다.

오전 11시 20분, 아스팔트 큰길을 만나서 오른쪽방향으로 오르면 구례군 노인전문요양원이 나오고 매실밭뒷길을 따라 오른다. 시멘트길 오두막 외기둥에 서면 구례읍과 섬진강의 전망이 좋다.

잎이 돋아날 때부터 단풍이 드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이채롭다. 구례군에서 만든 체육시설 주변에서 휴식 후 이른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1시 25분 출발한다.

멀리 구간 도착지인 오미리 일대와 문수제가 시야에 들어온다. 문수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산모롱이 끝에 문수사다.

문수사에는 야생 토종 곰 서너마리가 사육되고 있는데 신도 중 한사람이 반달가슴곰을 기증하는 바람에 철창 속에 넣어 사육하고 있다. 2000원을 통 안에 넣고 통에 있는 사료를 주면 곰들이 먹이를 서로 먹으려고 싸우면서 격한 반응을 보인다.

오후 1시 42분, 둘레길은 산중 전원주택단지 아래 임도로 연결된다.

한때 진학사 기자로 활동했던 현대시인 주성윤의 시비가 풀 섶에 반쯤 숨어 있다.

풀/신기루처럼 어느 백일에/별안간 드높이 치솟아 오른/세월의 망루 그 위서/날카로운 고양이 수염하나/번뜩한 순간 어둠은 들쥐가 되어 달아나 버렸다./석간수, 눈길 위에서, 학교 언덕에 핀 코스모스 등이 있다.

문수제 앞으로 내려서면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된 아담한 내죽마을. 조선 영조 1754년 경주이씨 이기명이 아들 3형제와 길지를 찾아 우리나라 곳곳을 찾아다니다 정착했다.

오후 2시 13분, 이어지는 하죽마을엔 250년 수령의 서어나무가 장승처럼 서 있고 오후 2시 20분에 오미마을 운조루에 닿는다.

둘레길은 또다른 길인 ‘남도 이순신길 백의종군로’와 만난다. 조선의 운명을 새롭게 비꾸고 7년 한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길이다.

▲오미마을에서 둘레길 16코스가 끝난다. 마을 옆에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이라는 뜻의 운조루가 있다.

운조루는 1776년 영조 52년 삼수부사를 지냈던 안동 출신의 유이주가 지은 집으로 1400평의 대지에 99칸의 집. 238년이 된 양반고택이다. 현재는 70여칸이 남아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 8호.

대문 위에 뼈조각 2개가 걸려 있는데 집주인 류이주가 잡은 호랑이뼈라고 한다. 가죽은 영조왕에게 올리고 뼈는 악귀를 쫓는 의미로 달아놓은 것이다.

어느 시절에 남편들의 바람 끼를 잡는데도 효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마을 아낙네들이 일부를 가져가기도 했다.

안으로 들면 운조루 대청 밑에 우마차바퀴가 있고, 타인능해라는 한자가 새겨진 쌀독은 운조루 내 별칸에 있다.

안채 처마 밑에는 안주인이 편리하게 손발을 씻을 수 있도록 돌로 만든 앙증맞은 물통이 있다.

/최창민·강동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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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 철창에서 사육되고 있는 반달가슴곰
▲타인능해라고 새겨진 쌀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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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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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소나무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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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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