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문화 경남의 자랑> 하동 화개장터
<경남의 문화 경남의 자랑> 하동 화개장터
  • 여명식
  • 승인 2014.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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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약초·남해 해산물 '백화점 장터'가 북적북적
화개장터 전경.
하동군의 대표 관광지로 둔갑한 화개장터 전경.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 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에, 아랫말 하동사람 웃마을 구례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 한 번 와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장터지만, 있어야할 건 다 있고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인기가수 조영남의 ‘화개장터’ 노랫말이다. ‘화개장터’는 조영남의 노랫말처럼 있을 건 다있고 없을 건 또 없다.

▲화개장터의 유래

화개면에서 발간한 ‘화개면지’에 따르면 화개장은 옛적에 전국 7위의 거래량을 자랑하는 큰 시장이였고 전북 남원과 경북 상주의 상인들까지 모여 들어 중국 비단과 제주도 생선까지 거래를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화개장에 대한 옛 기록은 영성(零星)하여 찾아보기가 힘든 형편이라는 것. 옛적에는 장(場)이라고 하면 행상들이 모여들어서 사고팔고 하고는 물러가는 것을 의미하였고 이런 구체적인 시장을 장터(場基), 장시(場市)라고 했다.

예부터 화개에 장이 크게 열렸던 것은 무엇 때문이였을까? 첫째는 섬진강을 통한 대량 운반수단이 있었기 때문으로, 옛날에는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없어 대부분 지역의 물품 운반은 인력에 의한 등짐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배를 통한 수운(水運)은 많은 물자를 한꺼번에 운반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항시 배를 댈 수 있는 내륙의 잘 정비된 나루에는 자연 발생적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런 나루가 배로 갈 수 있는 마지막 나루라면 더욱 그러했고, 바로 화개장이 그런 곳이다.


 
화개장터 주변 남도대교.
화개장터 주변에 있는 영호남 화합의 상징 남도대교.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섬진강은 조선시대에는 전남 구례군까지 배가 왕래하였으나 갈수기나 후대로 내려올 수록 배가 다닐 수 있는 가항종점(可港終點)이 차츰 차츰 강의 하류로 내려오게 됐다. 자연히 배가 계속 닿을 수 있는 곳은 상당한 규모의 시장이 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에 따르면 ‘구례의 남쪽 구만촌(구례군 토지면)은 강가에 위치하여 강산의 토지와 거룻배를 통해서 얻은 생선·소금의 이익이 있어 가장 살만한 곳이다’고 적혀 있고 배를 통한 해산물로 시장이 서고 이를 통한 이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항종점이 화개로 변하자 자연적으로 화개장이 번창하게 되었고 조선후대로 오면서 가항종점도 차츰 하류로 바뀌게 되어 시장도 따라서 하류로 옮겨가게 됐다.

조선후기에는 하동장이 크게 번창하여 진주장, 김천장과 함께 영남의 3대(三大) 시장으로 떠올랐는데 모두 수운의 잇점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화개가 편리한 수운과 함께 대규모로 하역된 소금, 생선 등의 해상물이 내륙지방 여러 곳으로 옮겨 갈 수 있는 교통로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우마차 등의 수레가 다닐 수 없는 육로에서의 운송수단은 등짐 밖에 없었다.

화개에서 내륙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는 영남내륙은 장터목으로, 전라도 내륙과 충청도 등지는 벽소령과 화개재를 통해 지리산 종주능선을 넘었다.

전라도 지방은 섬진강 강변을 따라 이동하였는데, 이 때문에 화개에는 등짐장수(새우젓갈이나 소금)의 음담패설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화개에는 큰 장이 형성될 수 있었고, 화개장의 특징은 여러 지방의 산물이 모였다가 다시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집하(集荷)시장 내지는 중개시장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즉 배에서 하역된 수산물은 보부상에 의해 내륙으로 가고 다시 보부상들에 의해 모아진 내륙의 임산물, 약재 등은 화개장에 모여 배로 실어가는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화개장터 보부상.
화개장터에 세워진 보부상 조각상.

화개장터_대장간.
화개장터에 있는 대장간은 지금도 옛날 방식 그대로 농기구를 만들고 있다.

 


화개장도 처음에는 상설시장도 아니였고 정기적으로 정해진 날에 서는 정기적인 시장도 아니었을 것이다. 바닷물이 만조일 때 소금배가 들어오면 인근의 보부상들이 내륙의 특산물을 지고 와서 소금과 물물교환 등의 거래를 하면 자연히 이틀이고 사흘이고 장이 선 것이다.

따로 정해진 장날은 없었다. 그러다가 전국 곳곳에 시장이 생기고 정해진 날에 시장이 서게 되고 인근 지방과는 같은 날을 피하여 10일 마다 혹은 5일 마다 장날이 생기게 되었는데 지금과 같이 5일마다 같은 시장에 장이 서는 5일장이 시작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또 하동군지에는 전남 구례군과 하동군의 경계에 있는 화개장터는 섬진강을 이용하는 수운 때문에 발달된 장터로서 이 장터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해방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7대 시장 중 하나로 손꼽혔던 곳이다.

뱃길이 화개장터까지 닿아 남해, 여수, 거제, 삼천포 등 남해안의 해산물이 이곳까지 실려와 하동, 구례, 남원, 함양 등지의 농산물과 지리산에서 나오는 임산물과 교환됐다.

이 때문에 ‘화개장터’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청거리는 날이 많아 전라도 지방에서 꾸려진 남사당, 여사당 등 협률(協律) 창극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으례 화개장에서 신명을 떨치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가 화개장터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 하는 것이다.

또 ‘화개장터’가 흥청거리니 자연히 주막집이 생겨나면서 한 집 건너 주막이라도 할 만큼 많이 생겨나고 그 중에서도 옥화(玉花)네 주막이 술맛이 유난히 좋고 값이 싸고 안주인의 인심이 후해 화개장터에서 가장 이름이 난 주막이였다는 것.

1948년 화개장터를 무대로 김동리 선생이 쓴 ‘역마’는 술장사를 하는 옥화의 3대(三代)에 걸친 가족인연의 묘리와 비극적인 운명의 사슬에 매여 있는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의식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는 수작으로 꼽는다.

소설 ‘역마’는 옥화의 아들 성기와 늙은 체장수의 딸 계연이 급속도로 가까워지지만 계연이 옥화의 배다른 동생으로, 즉 성기에게는 이모뻘이 되는 것을 확인하고 이 둘의 사이를 떼어놓기 위해 이 같은 사실을 옥화가 성기에게 이야기해 준다.

이로 인해 성기는 끝내 역마살의 운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계연이 떠나간 구례쪽을 등지고 하동쪽으로 역마살의 운명을 따라 엿판을 메고 떠난다.

‘역마’ 끝부분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서 있을 어머니의 주막이 시야에서 완전하 시라져갈 무렵하여서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였다’ 고 적고 있다.

▲화개장터 복원

조선 영조때(1770년)부터 5일장으로 전국에 명성을 떨쳤던 화개장, 지금도 영조때와 같은 1일, 6일이 그대로 장날이다. 그러나 5일 장이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화개장이 쇠락했다.

1985년 당초 화개장 부근과 영호남을 잇는 국도 19호선이 우기 때마다 섬진강의 범람으로 상습 침수지역이라서 하동군에서 소도읍정비사업을 벌였다.

당초 화개장 자리가 숭상되고 화개천이 섬진강과 만나는 지점에 새다리도 건설해, 새로 조성된 시장주변의 도로변에는 상가와 주택이 신축되고 시장은 좁은 골목에 2줄의 간이 장옥을 신축했으나 상인들이 파는 상품들도 옷가지 등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문에 화개장도 오전에 잠시 서고마는 시골장으로 변해 옛날의 화개장의 명성이 빛이 바래가기만 했다. 이에 하동군이 영호남 교류의 상징이자 교통길목에 위치해 예부터 명성을 떨치던 화개장을 복원하기로 했다.

1999년 12월 화개면 탑리 762-2번지 등 16필지의 부지 3061평에 화개장 복원공사를 시작해 총 16억7000만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전통장목 3동, 전시전망대 8각정, 관리실, 난전을 위한 시설과 화장실, 주차장에 ‘화개장터’비까지 완공했다.

이어 2001년 봄에 ‘화개장터’가 개장하면서 화개장의 명성을 회복하고 주변의 쌍계사 지리산 등과 연계한 관광문화 상품으로 주민들의 소득원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곳 ‘화개장터’엔 지리산에서 자란 약초를 비롯해 남해안의 해산물, 잡화 등 눈요기 꺼리와 지금도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 등 조영남의 노랫말 가사대로 ‘있어야할 건 다있고요 없을 건 없다’.

오는 주말 가족과 함께 ‘있어야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화개장터’를 찾아 본는 것도 하루를 즐기는 힐링이다. 거기다 ‘화개장터’ 상인과 관광객들의 쉼터 역활을 하며 각종 문화교실과 강연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난 2010년 11월부터 2011년 5월 건립한 ‘문화다방’과 영호남 화합의 상징인 남도대교도 한번 쯤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화개장터를 찾은 관광객들.
화개장터를 찾은 관광객들이 진열한 상품을 둘러보고 있다.
화개장터 문화다방.
화개장터 내 문화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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