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수난사
살구나무 수난사
  • 경남일보
  • 승인 2014.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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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말임 (수필가^어린이집 원장)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滿足)할 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지 말하지 아니 한다” 이양하의 수필 ‘나무’.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다. 청주시 흥덕구 하복대, 1994년부터 조성된 ‘살구나무거리’이다. 그 인근에 산다는 것을 나는 큰 복으로 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커피 한 잔에 신문을 대강 훑어보고선 살구나무거리로 산책을 나선다. 하천을 끼고 왕복 7㎞에 달하는 산책로에는 3000여 그루의 살구나무가 손을 흔들어 아침인사를 한다.

꽃샘추위가 다 물러나기도 전에 살구나무는 뭉게구름처럼 꽃을 피워 도시생활에 찌든 주민들을 불러들인다. 살구꽃이 난분분히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저물녘에 엄마·아빠 손잡고 나온 아가들의 재잘거림이 싱그럽다.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에 무심히 지나쳐 가던 사람도 걸음을 멈추고 어느 영화에서 봤을 법한 장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신록이 아름다운 시절을 지나고 녹음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면 중간중간 벤치와 정자에서 다리쉼을 한다. 시어머니들은 못다한 어제 이야기 매듭을 지어야 하고 밤사이 새로이 생겨난 이야기 꾸러미들을 풀어놓느라 석양을 등에 지고도 일어설 줄 모른다. 내 며느리 흉을 보자니 앞집 사는 이의 며느리 이야기, 사위 자랑도 들어주는 것이 예의다. 그래서 살구나무거리에 산책 나오는 시어머니들은 절대로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설악산 단풍소식이 들려오면 도심의 살구나무들은 일찌감치 옷 갈아입을 채비를 한다. 젊은 청춘들이야 산과 들에 행복을 찾아 길을 떠나지만 노인들과 아이들에게는 먼 산 홍엽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림일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먼 산에 가지 않아도 가을의 정취를 흠씬 느끼게 해 주는 살구나무거리는 그 덕(德)을 다 꼽을 수조차 없다.

그런데 살구가 노랗게 익어가는 이즈음에 볼썽사나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살구 몇 개를 취하려고 살구나무가 눈도 비비기 전에 등산화발로 무자비하게 발길질을 한다. 그들은 치기 어린 젊은이들이 아닌 50~60세 늙수그레한 어른들이다. 살구 몇 개가 정말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 어떤 사람은 살구나무에 몸을 퉁퉁 쳐댄다. 자신의 몸을 위해 다른 생명체에 피해가 될 일을 해야만 하는지.

“나무는 고독(孤獨)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이양하 ‘나무’.

이른 아침, 살구나무 앞에서 나는 부끄럽다.

박말임 (수필가·어린이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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