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 펼쳐진 승천하는 용의 모습
눈 앞에 펼쳐진 승천하는 용의 모습
  • 경남일보
  • 승인 2014.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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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천태산 용연폭포를 찾아가며
삼랑진역 급수대
삼랑진역 급수대
 
여름의 맛은 더위이고 제격의 멋은 피서이다. 달달 볶아대던 후끈후끈 삶아대던 이글거리는 태양은 패기 넘치게 용맹스러워 멋지다. 이른 아침 떠오를 때부터 벌겋게 이글거리며 산천초목도 좋고 삼라만상도 좋으니 한판 붙어보자고 시뻘겋게 달궈진 알몸으로 덤벼든다. 아침부터 지레 겁을 먹고 에어컨 밑에 비실비실 숨지 말고 ‘그래 좋다!’ 하고 손바닥에 침 한 번 ‘탁’ 뱉고 두 주먹 불끈 쥔 복싱자세로 맞서보는 용기를 내면 금방 배낭 챙겨 메고 신발 끈을 조이게 된다. 그렇다고 아무나 길손 따라하다가는 백발백중 낭패 본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제멋대로 혼자 나섰다간 돌아오면 문 안 열어줘서 속절없는 노숙자 되지 말고 살짝 나가서 수도 계량기 잠그고 ‘오늘 물 안 나온대’ 하고 식구들 데리고 나서야지 안 그랬다는 죽은 목숨이다. 순간의 선택이 말년을 좌우한다. 어쨌거나 부지런하면 눈 가는데 손이 가고 마음따라 발도 간다. 시원스럽게 물줄기가 내리쏟는 폭포를 찾아 길을 나섰다.

차도 안 만들고 휴대폰도 없었더라면 괴나리봇짐 느직하게 걸머지고 합죽선 차-악! 펼치고 나서면 멋도 멋이지만 오가는 사람 잡고 길도 묻고 안부도 전하며 말동무 보내면 길동무 만나고 길동무 떠나면 산새 들새 벗을 삼고 산천경개 섭렵하며 길 떠나는 맛이 제대로 날 것인데, 인정머리 없는 과학문명이 사람 사는 맛 다 망쳐 놓았다. 그래도 세상 따라 살아야지 별수 없이 차를 몰고 나서서 천태산 용연폭포를 찾아 동창원 IC를 나와 밀양방향으로 25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수산대교로 낙동강을 시원스레 건너서 상남에서 우회전을 하여 1022번 도로를 타고 삼랑진역 앞에 잠시 차를 세웠다.
천태사 계곡 원경
천태사 계곡 원경

삼랑진역! 진주발 부산행 열차에서 내린 이들이 부산발 서울행 열차로 갈아타느냐 마느냐로 가슴앓이를 했던 삼랑진! 청운의 뜻을 품고 가는 이야 말 할 것도 없고 찌든 가난이 몸서리쳐져서 미련 한 점 남김없이 경부선에 오른 사람도 많지만, 두고 온 고향이 돌아보여서 못가는 이, 좋은 사람 못 잊어서 못 떠나던 그 사람, 매몰참보다는 눈물이 뜨거웠던 돌아선 그 사람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옛 추억을 더듬을까. 옛 역사는 다시 지어졌고 언제나 목이 메여 목쉰 소리로 “위-익! 위-익” 하고 기적을 울리며 숨 가쁘게 달려온 증기기관차에 물을 보충해줬던 급수탱크만 무성한 담쟁이넝쿨로 늙은 몸을 감싼 채, 떡장수 할머니와 ‘아이스케키’(나무막대기를 손잡이로 꽂은 길쭉한 빙과) 하고 갱생판매원의 눈길을 피해 소리를 죽이던 소년이며, 얼굴이 시꺼먼 구두닦이 소년이랑 틈새만 비집고 다니던 쓰리군(소매치기)들은 지금은 어느 세월의 열차에 몸을 실었는지가 애타게 궁금하여 옛 시절을 그리며 초연히 홀로 섰다.

1923년에 건립되어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물 건너고 들 건너서 산을 돌아 떠나갔던 기적소리가 행여나 들려올까 귀를 기울이며 이제는 등록문화재 제51호가 되어 버린 급수탱크를 뒤로하고 삼랑진역을 나와 천태산을 향해 차를 몰았다.

삼랑진읍을 벗어나자 사방에서 볼거리들이 옷소매를 잡아끈다. 작원관지·잔도·만어사·여여정사·부은사 등 곁눈질 했다가는 용연폭포는커녕 개골창동 못가고 발목 잡힐 게라서 1박2일 정도의 훗날을 기약하고 앞만 보고 달렸다. 온갖 맛집들이 길을 따라 즐비하고 길섶으로 연이어진 가판대의 봉숭아에 침을 꿀꺽거리며 안태리를 벗어나자, 양산으로 이어지는 1022번 2차선 도로는 산기슭을 거슬러서 오르막으로 이어지는데, 굽이굽이 열두 굽이가 드라이브 코스로는 기막히게 멋진 길이다. 급커브를 예비하고 차선이 넓어지더니 꽤나 널찍한 주차장을 마련하고 간이매점이 횡대로 늘어서서 커피, 라면, 파전, 막걸리 등 먹을거리의 안내판이 화투 스물넉 장을 펼친 듯이 화려하고 요란하다.
 
 
천태사 마애대불
천태사 마애대불


차가 들어설 땐 눈길이 모이더니 혼자 내리니까 눈치 빠른 주인들은 거들떠도 안 보는데 거슬러 오른 길을 뒤돌아보니 몇 굽인지 헷갈린다. 이를 두고 구절양장이라 했던가. 하지만 제아무리 굽이져도 인생살이 굽이만큼이야 하련만은 이나저나 한숨 돌리고 ‘파전 구워서 막걸리 한 사발이면 딱! 인데 저놈의 원시(원수)덩어리 차 때문에’ 하려다가 차가 들을까봐 얼버무리고 산마루에 오르니까 예서부터 양산이란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격언처럼 몇 굽이를 돌고돌아 어느 모롱이 끄트머리에 닿으니까 빤하게 절집이 보이는 계곡이 그림같이 펼쳐졌다.

계곡을 건너지르는 짤막한 다리가 급커브에 걸쳐진 왼편으로 단청이 화려한 드높은 일주문이 ‘천태산통천제일문’이라는 편액을 달고 한눈에 들어온다. 길섶을 주차장 삼아 넓혀 두었기에 차를 세우니 교량의 이름이 용당교이다. 우리 선조들이 지명이든 이름이든 허투루 붙인 게 없고 보면 이곳 어딘가에 용의 집이 있나 보다. 용이 사는 연못이 용연이라면 용연폭포는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며 일주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깊은 계곡을 끼고 오르자 천태사 대웅전이 거느린 크고 작은 전각들이 빼곡하게 계곡을 메우고 들어찼다.

심산 절집이 어딜 간들 엇비슷한데 ‘천태전’이 있고 ‘용왕당’이 있다. ‘용왕당’ 찬물을 한 쪽박 들이켜고 엊그제 십일 만에 퇴원한 몸이라 장수는 사절하오니 옆에 사람신세만 안 지게 무병건강을 소원하고, 소원석굴·나한석굴 등 전각마다 빠짐없이 예를 갖추고 끄트머리에 닿자, 오른쪽의 수십 길 절벽을 깎아 불상을 새기고 단청이 화려한 닫집을 제비집처럼 붙여 달아 ‘무량수궁’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불로 삼은 아미타대불은 높이가 16m이고 보니 쳐다보기도 고개가 아프다.

“부처는 마음에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웅장한 절집에만 계십니까, 거대한 석불이십니까, 우람한 범종이십니까? 바깥세상은 하루살기가 버겁기만 합니다. 어떤 축에라도 끼여야 살 수 있는 세상이라 겉은 그럴싸해도 앓는 속은 이미 중병입니다. 실눈만 뜨고 보시지 말고 크게 눈을 뜨시고 속계를 굽어 살펴 주옵소서! 나무본사 아미타불!”

마주한 나한석굴 앞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도토리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접어들자 크고 작은 바윗돌이 뒤범벅이 되어 너덜겅을 이루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 지구를 박살내려 했었던가. 아니고서야 이토록 많은 바위들이 널브러졌단 말인가. 6·25만큼이나 절박했을까, 유월항쟁 만큼이나 절실했을까, 아니면 세월호 참사만큼이나 분통이 터졌을까, 경천동지가 아니고서야 집채 같은 바위가 계곡에 즐비하고 농짝만한 바위가 사방에 나뒹굴며 크고 작을 돌들이 지천으로 널려서 너덜겅을 이뤘을까. 언제나 말이 없이 무던하던 땅덩어리도 몸서리 처지는 몸부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어쩌면 원한의 날이 번뜩일 것도 같건만 틈새마다 참나무, 서어나무, 더러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부둥켜안고 계곡엔 물길도 이리저리 틔어주고 산바람이 스쳐갈 틈새도 내어주며 물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도 한가득 품으면서 파란 하늘에 떠가는 구름까지 전송하니 ‘너’와 ‘나’라는 경계는 처음부터 없었나 보다.

계곡을 가로막고 길게 누워 미련스러운 녀석도 있지만 고달픈 삶을 잠시 쉬어가라고 펑퍼짐한 등을 내놓은 녀석이며 무릎을 까놓고 밟고 오르라며 어깨를 내밀며 손잡이가 되어주는 녀석 등 어쩌면 오지랖이 이리도 드넓을까. 온갖 생각에 젖어들어 옹졸한 삶이 민망스러워 겸연쩍은데, 협곡은 더 좁아져서 하늘이 강물처럼 길게만 보이는 마주한 준봉마다 검푸르게 울창한 수목들 사이의 희끗희끗한 암벽들은, 신선이 한나절을 쉬었다가 승천을 하는 건지, 용연폭포에서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날개옷을 하늘거리며 천상으로 나르는지, 산꼭대기를 향해 떠오르며 하나 같이 손을 흔들며 애꿎은 심사를 다독거려주는 것만 같다.

푸성귀를 한소끔 솎듯이 이마의 땀이 쭈르르 흐를 쯤 해서 물소리가 갑자기 요란해지더니 가느다란 물줄기가 층을 이룬 계곡의 암벽을 타고 쏟아져 내렸다. 서너길 높이의 작은 물줄기를 두고 용연폭포라고 했을까. 침소봉대에는 재간깨나 있는 민족이라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데 요란한 물소리 뒤에 또 다른 묵직한 물소리가 있어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이제는 계곡의 양편이 모두 수직에 가까운 드높은 절벽이다. 천인단애가 양편에서 조여드는데 순식간에 입을 다물어 버리면 빽! 하는 소리도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암벽 속에 갇혀 버릴 것만 같은 협곡이다. 물소리에 산새소리도 매미소리도 다 묻혀 버렸는데 수목 사이로 저만치에서 은빛을 번뜩거리며 암벽을 기어오르는 꼬리 끝이 보였다. 잰걸음 몇 발을 내딛자 하늘을 향해 은빛 찬란한 날씬한 몸통과 부채살 같은 꼬리 끝을 힘차게 휘젓는 폭포의 물줄기는 수십 길 절벽을 솟구쳐 오르는 승천의 몸부림이 확연히 한 마리의 백용이었다.
천태산 용연폭포
천태산 용연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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