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178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178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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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3. 신종(神鐘)은 울리고
‘우리가 살 길은 비차를 포기하고 깊은 산골이나 외딴 섬으로 들어가는 것일 게다.’

조운은 모로 돌아누우며 생각했다. 그들 목숨이 문제가 아니라, 만일 왜군이 비차를 발견하고 총칼로 위협하며 그 쓰임에 대해 물으면 답하지 않을 수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시민을 구하기 위해 만든 비차가 도리어 시민과 조선 군사들을 해치는 무기로 악용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비차를 포기할 수도 없지 않은가?’

조운의 눈이 아래채를 향했다. 거기 잠들어 있을, 아니 필경 잠들지 못하고 있을, 먼 외지에서 온 정평구를 떠올려보았다. 비차를 향한 그의 집착과 애정을 헤아려 볼 때, 비차를 버리고 달아나자고 하면 당장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긴 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해도, 나 또한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

둘님이 조운 자신처럼 벽을 향해 돌아눕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불러오는 배 때문에 그렇게 눕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다. 도원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아내를 옆에 눕혀놓고 그런 생각을 하는 그 자신이 파렴치한 놈이다 싶었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광녀 모습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그날, 그가 분지에서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하려고 하는 순간에 나타난 광녀. 그녀가 조금만 늦게 거기 왔더라면 그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나도 너도 그 밖에도 아무도 없고 비차도 없을 것이다. 이것도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차라리 그때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둘님이 자꾸 몸을 뒤척였다. 뱃속 아기가 발길질을 시작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조운은 한없이 부끄러웠다. 저 어린 생명이 태어나기도 전에 명색 아비라는 사람이……. 모두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이런 판국에 무슨 호강 받친 짓이냐?

장지문에 비치는 빛으로 보아 달도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그립고 애틋한 감정이 물살처럼 밀려들었다. 왜구가 이 땅에 발을 들여놓기 전, 당시에도 이런저런 고민과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처녀들이 나물 캐는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 언덕이나 아이들이 씽씽 얼음지치기를 하는 겨울 남강 가를 거닐던 평화롭던 날들이었다.

조운의 기억은 정월 대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는 비봉산을 더듬었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 난리통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까 하는 생각보다도, 지나간 날들의 행복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들이 더 또렷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비봉산은 그의 탄생과도 관계가 깊은 봉황새가 살았던 산이라는 사실에 더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기억들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왜적의 눈에 띌까 봐 밝은 달보다도 깜깜한 어둠이 더 좋았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볼 수가 없고 들을 수도 없었다. 그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비차 하나뿐이었다. 또한 유일하게 들리는 것, 그것은 바로 광녀와 함께 춤을 추며 불러대던 그 노랫소리였다.

난다 난다 비, 비차. 진주성에 가보자. 비차 비차 비차다. 진주성에 가보자. 난다 난다 비, 비차. 진주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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