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 가계
소극적 가계
  • 경남일보
  • 승인 2014.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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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청 (시인, 진주제일여고 교사)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모두가 경악했고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라고 인식했다. 그동안 무심코 생각하고 지나쳤던 우리 사회의 문제가 고스란히 녹아 있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채 100일도 지나지 않아 먹고살기가 바쁘다는 핑계로, 경제 살리기가 중요하고 갈 길이 바쁘다는 핑계로 세월 따라 점점 ‘세월호’가 잊혀져가고 있다. ‘세월호’에서 제기된 문제를 넘어서야 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당장 눈앞의 현실에 압도돼 하루빨리 ‘세월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느 시인은 노래하였다. “나는/세상을 바꾸려는 일에/단 한 번도/가담해본 적 없어//겨울 내내/굵은 털실로 아버지의 털조끼와/어머니의 털목도리를 짜면서/될 수 있는 한/세상의 바깥으로 나가는 발걸음을 거부했어//나의 딸도/아들도/모두 나를 닮았어/‘사오정 세대’인 나와/‘인턴인생’인 그들/내가 몸값이 없듯/나의 딸과/아들도/자기 세상의 값을 매기지 못하고 살지/누가 나와 가족들에게/벗어던지기 어려운/위기의 옷을 입혀 주었을까.(김경 시인의 ‘소극적 가계’ 전문)

이 시대는 누가 뭐래도 위기의 시대이다. 위기의 시대인데 위기인 줄 모르고, ‘몸값이 없이 위기의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들이 ‘세상의 바깥으로 나가는 발걸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우리의 아들과 딸이 ‘몸값이 없는, 자기 세상의 값을 매기지 못하고’ 살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나와 가족들에게/벗어던지기 어려운/위기의 옷을 입혀준’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다. 말하자면 세상과 연애하지 않고 너무 고결하게 산 결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위기가 개인적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의 딸도/아들도/모두 나를 닮’아 구조적으로 고착화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과 단절된 우리들의 ‘자폐가 자폐아를 키우고’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삶에 대한 어떤 격정과 애증은 점점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있다. 차라리 누군가를 실컷 미워하는 것이 훨씬 인간적인 시대가 되어 버렸는가. 그래서 어느 시인은 이 시대에 ‘연애 같은 삶’이 요구되고 있다고 노래하였다. ‘연애 같은 삶’이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삶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느낌이 들지만 연애는 자신이 껴안고자 하는 삶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들의 삶이 사적인 관계와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반드시 개인적인 사랑으로 인해 ‘껍질까지 벗어던진 바닥없는 미궁’ 속에서 헤맬 필요는 없다. 다만 바닥없는 미궁에 던져지더라도 그 ‘바닥없는 미궁’을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이 곧 치열한 삶이고, 이러한 연애 같은 삶이야말로 이 시대의 절망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버팀목이다. 음풍농월에 기대어 결코 어느 ‘편식주의자’만의 애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은 껍질까지 벗어던져야 하는, 이 시대 인간의 생리에 맞지 않는다. ‘그대의 호명’을 기다리는 삶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그것은 너무 소극적이다.

우리들은 모두 자폐를 앓고 있다. 자폐에도 서열이 있어 검열과정을 통해 검인증까지 받으면서 자폐의 등급을 매기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한번 검인증을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자신의 속이 텅 비는 줄도 모르고 온 세상을 파프리카처럼 본다.’ 그러면서 자신이 바라보는 것만이 ‘선’이라고 믿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 정말 우리가 이런 사회에 살고 있다면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심한 자폐증을 앓게 될 것이 아닌가. 우리들이 이런 악순환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자폐증에 의해 닫힌 시각으로 서열과 등급을 매겨 마음을 닫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자폐증이야말로 자신을 침몰시키고 우리 모두를 침몰시키는 위기의 원인이 아닐까. 아무리 힘들더라도 ‘세월호’를 잊지 말자.

하재청 (시인, 진주제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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