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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풀리지 않는 恨]조세이 해저탄광 붕괴사고지금은 평화로운 바다, 그 수면 아래 참혹한 역사
최창민/임명진  |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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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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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면에서 불쑥 솟은 피야. 해저갱도의 환기구로 사용됐다.
 
 
7월 중순 무더위로 전국이 서서히 뜨거워질 무렵, 본보 취재진은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 취재는 한일 양국의 아픈 역사의 흔적을 찾아 가는 길이었다. 최근들어 일본은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아베정권이 들어서면서 군국주의 부활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가 우리다. 가깝게는 100여 년 전에 나라를 빼앗겼고, 멀리는 400여 년 전 일본에 의해 전 국토가 유린당하기도 했다. 이에 본보는 역사의 가해자인 일본이 잘못된 과거를 돌아보고, 더 이상 역사에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100년 전과 400년 전 영혼들의 한이 서린 국내와 일본내 흔적들을 찾아 소개하는 지면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침략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어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한다
또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통해 교훈을 얻어 진정한 세계속 동반자가 되길 고대한다. /편집자 주



<목차>
1.조세이 탄광의 비극, 그들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2. 끌려간 조선인들, 일본 최초의 도자기를 만들었다.
3. 400년 전 조선인의 귀무덤이 교토에 있다.
4. 도시샤대학, 거기에도 ‘서시’가 살아 있었네.
5. 울산사람들 그들은 왜 구마모토성으로 갔을까.
6. 조선 최고의 외교관 유정, 이에야스에 “어쩌다 잘못해 닭 무리 속에 떨어졌다.”

임명진 조세이탄광 (8)
우치오카 사다오 조세이 시민 모임 공동대표


뙤약볕 아래 놓여 있는 한송이 꽃다발. 추모비에 적힌 수많은 희생자들 명단. 어디서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낯익은 이름들. 지난 달 15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본보 취재진은 태평양 전쟁당시 탄광업이 번창했던 우베시의 니시카와 해변에 서 있었다.

이곳엔 1942년 2월3일 발생한 조세이 해저탄광의 붕괴로 숨졌던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에는 한국어로 새겨 놓은 글귀가 적혀 있다.

…조선인 희생자와 그 유족에게는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과의 마음을 올립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비극을 낳은 일본의 역사를 반성하고, 다시는 다른 민족을 짓밟는 포악한 권력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여기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깁니다. -2013년 2월2일, 조세이 탄광의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예견된 사고였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조차 위험하다고 일하기를 꺼렸던 곳이었으니까요”
현장을 안내한 우치오카 사다오(67)씨는 “그날의 참상은 일본이 만들어 낸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전직 교사출신의 우치오카씨는 일본 시민단체인 ‘조세이 탄광의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72년 전 그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1942년 2월3일 아침 9시무렵. 막 교대를 마친 조선인들은 여느 때처럼 해안에서 1000m 쯤 떨어진 해저갱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석탄을 채굴하고 있었다. 캐낸 석탄은 석탄차로 쉴새 없이 갱도 밖으로 실려 나갔다. 1일 2교대로 매일같이 12시간씩 혹독한 노동을 했기에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지만 제대로 쉴수 조차 없었다.
임명진 조세이탄광 (10)

주변에는 일본인 감독관들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갱도는 여기저기 곡갱이질 소리로 가득했다. 갑자기 갱도의 중간 지점의 천장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시퍼런 바닷물이 억수같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갱도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갱도의 후미에서 붕괴를 목격한 이들은 탄광 입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갱도의 깊숙한 안쪽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어쩔 줄을 몰랐다.
서서히 갱도에는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탈출을 시도했지만 거센 물살에 역부족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바닷물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겨우 두 명 뿐. 그렇게 136명의 조선인들이 산채로 갱도에 매장당했다. 그들을 감시하던 일본인 47명과 함께.

“아무도 그들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탄광이 붕괴되고 72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은 바다에 갇혀 있습니다”

당시의 참혹한 상황이 떠올려지는 듯 우치오카씨의 시선은 바다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 추모비가 있는 곳에서 500m 쯤 떨어진 바다 위로 두 개의 돌기둥이 솟아 있었다. 사고 현장이다.
“피야(pier)라고 부르는 해저갱도의 환기구입니다. 갱도가 무너지고 나서 사흘동안 저 곳에서 물기둥과 거품이 솟아 올랐다고 합니다”
사고가 나자 일본은 군인을 동원해 탄광을 폐쇄했다. 구조의 손길만을 기다리던 희생자 가족들은 사흘 밤낮을 해안가에서 서럽게 울부짖었다. 오빠를 잃은 여동생의 애타는 통곡과 아빠를 찾는 어린아이의 슬픈 울음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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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차 레일에 쓴 일본인들, 경영진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의 어린아이의 모습은 조선인 아이로 추정된다. 상품화되지 못한 저질 석탄은 끌려온 조선인들이 가정용 연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연료인 석탄 증산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부족한 노동력은 조선에서 끌고 온 조선인으로 충당됐다. 조세이탄광은 현지 일본인들이 ‘조선탄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인들이 많았다.
돈을 벌수 있다는 꾐에 빠져 가족과 함께 이주한 조선인도 있었지만, 1939년 부터 강제로 징용되기 시작하면서 400여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혹독한 강제노역을 당했다.

그중엔 경남출신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사천군과 고성군에서 집중적으로 강제징용됐다. 현재까지 확인된 명단에는 조세이탄광에 도착한 날을 기점으로 1940년 5월 10일 31명(출신지 미기재), 1940년 9월21일 72명(사천군, 고성군), 10월 17일 82명(사천군, 고성군), 10월 30일 46명(사천군, 고성군), 11월 30일 49명 (출신지 미기재), 12월 20일 42명 (출신지 미기재)이 강제 연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희생된 136명의 조선인의 출신지는 경남 34명, 경북 60명, 전남 4명, 충남 9명 등으로 확인되고 있다.

조선인이 많았던 가장 큰 이유는 탄광 자체가 안전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조세이 탄광은 우베시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길이 1010m의 해저갱도를 가지고 있었다. 해저갱도의 경우 지표면과의 거리를 100m 이상 두어야 하지만 조세이 탄광은 25~30m 정도에 불과했다. 갱도를 뚫을 수록 그만큼 붕괴 위험이 높았다.

우치오카 대표는 “위험하다는 소문 때문에 일본인들은 일하기를 꺼려 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대거 동원됐다. 증언에 따르면 그때 갱도 위쪽의 바다를 지나는 배의 엔진소리가 들릴 정도로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 탄광에서 조선인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일이 주어졌다. 갱도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서 1일 2교대로 매일 같이 석탄을 채굴해야 했다. 결국 조세이 탄광의 비극은 조선인의 생명을 경시한 일본의 착취가 부른 것이다.

서슬퍼런 일본의 칼날에 그대로 묻힐 뻔한 조세이탄광의 비극은 양심있는 일본인의 노력으로 조금씩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1991년 조세이 탄광의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을 발족해 이 참상을 일본 사회에 알리는 노력을 펼쳐 왔다. 이들은 백방으로 희생자의 가족을 수소문했다. 그런 노력으로 한국인 유족 65명을 찾아냈다. 10여 년 전에는 사고현장에 잠수부를 투입해 갱도의 지지대로 추정되는 목재를 건져내기도 했다.

지난 해 2월에는 모금활동을 주도해 사고현장이 내려다 보이는 지금의 부지에 참사 71주년을 기념하는 추모비를 세웠다. 우치오카씨는 “한일 양국의 평화와 미래를 위해서라도 일본의 잘못되고 불행한 역사를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면서 “아직 차가운 바다속에 남아 있는 희생자들의 유골 발굴작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발굴까지는 험난한 여정이다. 추모비를 건립하기까지 18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한일 양국의 어느 정부도 이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시민모임에서 막대한 발굴 비용을 충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모임의 목적도 추모비 건립까지였다. 우치오카씨는 “당초 목적은 완성은 됐지만 작년 추도식에서 한국 유족분들의 ‘멈추지 말아 달라. 유골이라도 보게 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면서 “발굴을 하려면 많은 예산이 필요하기에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인들은 하루 12시간씩 중노동을 해야 했다. 힘든 노동을 마치고 나면 높다란 장벽에 둘러싸인 좁은 수용시설에서 잠을 잤다. 탈출할 꿈도 꾸지 못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조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고된 나날들, 그들을 지탱하게 한 것은 단 한가지.
언젠가는 그리운 고향,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어서도 여전히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할 수 있는지 조세이 탄광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시시각각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마치 이제는 바다속에서 꺼내달라는 울부짖음 처럼 들려왔다.


글·사진=최창민·임명진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임명진 조세이탄광 (17)
우치오카 사다오 공동대표는 일주일에 한 두번씩은 추모비를 찾아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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