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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풀리지 않는 恨] 아리타 도자기 마을임란때 끌려 조선도공들의 魂이 숨쉬는 곳
최창민·임명진  |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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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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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마을의 전경. 한국의 여느 농촌도시처럼 평온하다.

 
 
 
7월 중순 무더위로 전국이 서서히 뜨거워질 무렵, 본보 취재진은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 취재는 한·일 양국의 아픈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최근 들어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아베정권이 들어서면서 군국주의 부활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가 우리다. 가깝게는 100여년 전에 나라를 빼앗겼고, 멀리는 400여년 전 일본에 의해 전 국토가 유린당하기도 했다.

이에 본보는 역사의 가해자인 일본이 잘못된 과거를 돌아보고, 더 이상 역사에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100년 전과 400년 전 영혼들의 한이 서린 국내와 일본내 흔적들을 찾아 소개하는 지면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침략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어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한다. 또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통해 교훈을 얻어 진정한 세계속 동반자가 되길 고대한다. /편집자 주



<목차>

1.조세이 탄광의 비극, 그들은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2. 끌려간 조선인들, 일본 최초의 도자기를 만들었다.
3. 400년 전 조선인의 귀무덤이 교토에 있다.
4. 도시샤대학, 거기에도 ‘서시’가 살아 있었네.
5. 울산사람들, 그들은 왜 구마모토성으로 갔을까.
6. 조선 최고의 외교관 유정, 이에야스에 “어쩌다 잘못해 닭 무리 속에 떨어졌다.”

이즈미야마 산. 일본 자기의 발상지인 아리타의 역사는 이삼평이 이곳에서 도자기의 원료인 도석을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1980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다. 아직도 매장량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배수시설의 불비와 채산성 등의 문제로 현재는 채굴하지 않고 있다.

 
 

아리타는 일본 최고의 도자기 마을로 통한다. 일본 최초의 도자기가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마을이다.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는 조선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이 이곳 아리타에서 도자기 원료인 고령토를 발견해 일본 최초의 백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일본 도자기 발상지인 아리타의 시초다. 그래서 아리타에서의 취재는 어찌보면 서글픈 일이었다.

일본 큐슈 사가현의 서쪽에 자리한 아리타는 인구 2만여 명의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을 연간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고 있다. 매년 4월 29일에서 5월 5일까지는 아리타 도자기 축제가 열리는데, 이 기간에만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조선인, 이삼평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아리타 마을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을의 오늘이 있게 만든 분입니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이삼평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현지 주민들은 이삼평을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하고 있었다. 아리타에는 이삼평을 기리는 신사와 기념비가 있다. 마을 거리마다 도자기 가게들이 즐비하게 서 있고, 절반이 넘는 주민들이 도자기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다.


 

아리타 마을의 한 야산에서 발견한 비석들. 고라이상으로 불리는 이곳은 현지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만 풍화로 인해 일부 비석은 그 내용을 알기 어려웠고 조선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단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본보 취재진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조선 도자기의 흔적이 바로 이곳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기 때문이다.

400여년 전, 아리타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공격한 나베시마 나오시게라는 일본 장수의 영지였다. 나베시마는 경남의 진해(웅천), 김해 등지에서 수많은 조선인 도공들을 납치해 아리타로 끌고 갔다.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은 초기단계의 토기와 그보다 약간 발전한 도기, 두 종류만을 생산하고 있었을 뿐 도자기는 만들지 못했다. 조선의 도자기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로 이어지는 특유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 장수들이 경쟁적으로 조선인 도공을 끌고 가기 위해 혈안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인 도공들은 아리타에서 도자기 제작에 필요한 연료와 물을 찾아냈다. 가마터를 짓고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리타 도자기는 조선 백자 양식에 과감하고 다양한 채색과 기법들을 더해 해외로 팔려 나갔다. 당시의 영화는 지금은 일본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이즈미야마 산에서 확인할 수 있다.

‘400년 동안 하나의 산을 도자기로 바꾸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이즈미야마에는 아직도 당시의 채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이 빚어낸 도자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동북아의 근대 지형도를 바꿔 놓는데 일조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문화나 경제력에서 늘 일본을 능가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1592년 임진왜란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조선이 자랑하는 도자기 기술이 일본에 유출되면서 일본은 한국을 경제력에서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날 ‘임진왜란=도자기 전쟁’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카즈미 아리토미(54) 아리타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은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던 중국이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도자기 수출이 중단되자 유럽 무역상들이 아리타 도자기를 찾았다. 수백만 개에 달하는 생활도자기와 예술품이 유럽에 수출됐다”고 말했다.

아라타도자기마을 (147)
아리타마을의 도자기 가게. 화려한 채색기법이 눈길을 끈다.
일본은 1600년 중반부터 도자기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에서 유럽과 활발한 해상교역을 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었다. 조선은 세계 최고의 기술과 제품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쇄국무역으로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1600년대 중반, 중국의 도자기 수출이 중단됐다. 조선인 도공이 만든 도자기가 일본산 도자기로 둔갑해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일본은 아리타 도자기로 유럽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내부적으로는 막부가 무너지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고, 대외적으로는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가장 먼저 성공할 수 있었다.

아리타는 오는 2016년 아리타 도자기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축제와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990년을 정점으로 일본의 거품경제가 빠지기 시작하면서 아리타 도자기 산업도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전성기인 90년대의 7분의 1 수준으로 출하액이 급감했다. 수제작이 아닌 공장의 대량생산된 그릇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카즈미 사무국장은 “300주년 기념으로 아리타가 내려보이는 공원에 이삼평 기념비를 건립했는데, 400주년을 맞아 아리타 도자기의 우수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끌려온 조선인 도공들의 삶은 어땠을까. 현지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사무라이 수준의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조선인 도공들은 최고의 기술자였고, 그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다 주었다.

취재 도중 한국식당을 운영하는 교포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저기 보이는 산속에 조선인들의 무덤이 있어요” 마을의 한 야산에 조선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현지인들조차 잘 모르는 집단 묘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 남성과 결혼해 아리타에 터를 잡은 한정숙(54)씨는 “25년 전에 한국에서 시집을 오면서 사별한 남편이 매일 같이 산을 향해 기도를 했다. 도대체 어딜 보고 그렇게 기도를 하는 건지 궁금해 물어봐서 존재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한 씨는 “남편은 그곳에 옛 조선인 도공들의 무덤인 ‘고라이상’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도 정확한 기원은 잘 모른다고 했다. 다만 자신이 한국여자랑 결혼해 인연을 맺게 되었고, 가족을 건강하게 잘 지켜 달라는 뜻으로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고 말했다.

‘고라이’는 일본말로 고려, 상은 사람을 뜻한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들을 모두 고라이로 지칭한다. 때문에 고라이는 조선이 될 수도 있다.

한 씨의 딸 나카무라 카오리(24)씨의 안내로 현장을 찾았다. 작은 야산의 중턱에 자리한 현장에는 오랜 세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한 4개의 비석이 서 있었다. 주변의 흔적을 찾아보니 예전에는 모두 10여 개의 비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비석을 샅샅이 살펴 보았지만 비석마다 풍화가 심해 제대로 글자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일부 비석에서 희미하지만 연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천화(天和) 2년(1682년), 또 다른 비석은 천명(天明) 5년(1781년)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아쉽게도 도공의 것으로 추정되는 단서는 찾지 못한 채 산을 내려와야 했다.

마을로 들어서자 마침 나이 지긋한 서너 명의 동네 주민들이 모여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혹시나 비석의 사연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묻자 “아! 고라이상”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 주민은 “어릴 적에 고려인들의 무덤이라고 듣긴 들었는데, 자세한 내용을 알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무섭다는 인상 때문에 마을 사람들도 이 산에는 거의 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민들은 한결같이 비석을 ‘고라이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을 대대로 비석이 조선인들의 것이라는 인식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400여년 전에 아리타로 끌려온 조선인 도공은 수백여 명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 땅에서 매순간 그리운 고향을 생각하며 혼을 담아 도자기를 빚어냈을 것이다. 방치된 채로 남아 있는 쓸쓸한 비석에서 그들의 생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였던 우리의 도자기 기술은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 그래서 아리타는 한국인이 보기에는 다소 씁쓸한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아라타도자기마을 (97)
이즈미야마 자석장에서 캐낸 원석과 아리타도자기.
아라타도자기마을 (111)
이삼평비. 2005년 건립해 매년 5월4일 감사제를 열고 있다.
아라타도자기마을 (125)
아리타마을의 도자기 가게. 일부는 가업으로 계승돼 내려오면서 100년 이상 된 150여 채의 건물은 국가전통건물로 지정돼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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