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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풀리지 않는 恨] 교토 '이총'임진왜란이 낳은 잔인한 전리품 '조선인의 귀 무덤'
최창민/임명진  |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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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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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 이총 전경
 
일본의 오사카성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였다. 이곳의 천수각에는 1597년 10월 1일 히데요시가 발행한 특이한 영수증이 소장돼 있다. 영수증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지역에 출정한 나베시마 가츠시게 군대가 전라도 금구·김제지방에서 절취한 조선인의 코 3369개를 바치고 받은 수취장이다. 히데요시의 측근이 코를 받았음을 증명하는 영수증을 써주고 코는 술통에 넣어 일본으로 보내 히데요시가 실제 검사하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대륙 진출의 야심을 품고 1592년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이 지지부진하자 부하장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 전리품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 그 수량을 적은 확인서까지 배부했으니 휘하 장수들은 서로 혈안이 돼 조선인을 학살했다.

베어진 코와 귀는 소금에 절여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보냈다. 오사카항에 도착한 코와 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교토로 가져가 매장했다. 오늘날 귀 무덤이라 불리는 이총이다.

이총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로 교토 이총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입증하기 위해 조선 군인과 양민 12만 6000여 명의 코와 귀를 잘라 큰 무덤을 만들어 매장한 것이다.



교토의 이총은 마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엄을 기리는 상징물처럼, 히데요시를 신격화하고 있는 풍국신사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교토의 역사가 오래됐다고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은 얼마 되지 않아요. 그 중 하나가 임진왜란 당시에 희생된 조선인의 귀 무덤, 바로 여기 이총이에요.”

원래 명칭은 코 무덤이었다. 일본에서조차 그 명칭이 너무 잔인하다 하여 귀 무덤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취재에 동행한 통역사는 “교토를 찾는 한국관광객은 많지만 정작 이곳은 잘 찾지 않는 장소”라고 했다. 그 연유를 물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을 왔는데, 이곳은 슬픔과 분노만을 안고 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덤 위에는 작은 석탑이 세워져 있다. 그 모양이 마치 무덤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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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의 이총. 무덤 위 석탑이 조선인 영혼들을 마치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간인을 상대로 신체의 일부분을 집단적으로 베어낸 잔혹한 짓은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은 왜 이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그 배경에는 조선인의 격렬한 저항에 있다. 일본군은 개전 초기만 해도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조선은 개국 이래 큰 전쟁을 겪지 않았다.

군대가 있었지만, 제대로 그 기능이 발휘될 수 없었다. 반면 일본은 100여년 간의 내전을 끝마치고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조총 등 신식무기로 무장해 조선군에 패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은 일본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조선은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일본의 야심을 가로막았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은 양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실례로 일본군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인의 귀와 코를 1300개나 잘랐다고 기록에 남기고 있다.

당시의 참상은 우리의 각종 기록에도 남아 있다. 재상 유성룡은 그의 저서 ‘징비록’에 ‘왜놈들은 조선인을 보기만 하여도 코나 귀를 베어갔다’고 전하고 있다.

전투가 극심했던 경상도 일대에는 코나 귀가 없는 조선 백성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도 이총의 잔재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울면 안돼, 에비’,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어른들이 종종 써는 ‘에비’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코나 귀를 베어가는 일본군을 가리키는 이비(耳鼻)였으나 나중에 에비로 변형됐다고 한다. ‘눈을 뜨고 있어도 코 베어간다’는 말도 여기서 유래됐다고 보고 있다.



이총의 흔적은 가깝게는 사천시 선진리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선진리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은 성이다. 원래는 조선의 토성이었으나 여기에 일본군이 왜성을 증축했다.

1598년 10월 1일 전후, 선진리성의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출동했지만 밤사이 명나라 진중의 화약고가 폭발했다. 여기에 일본의 야간기습에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8000여 명의 조명연합군이 희생당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대부분은 명나라 병사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을 세우려는 욕심에 무리하게 진격한 것이 화근이었다.

일본군은 당시 숨진 연합군의 목을 베어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이것이 선진리성에 남아 있는 조명군총의 유래다.

1992년 민간단체의 노력으로 일본 교토의 이총 봉분에서 채취한 흙을 사천시에 가져와 봉안했다. 원래는 조명군총과 나란히 묻혔으나 그 성격이 다른 유적이라고 하여 분리해 안치했다.

장병석(71) 사천문화원장은 “지난해부터 조명군총 행사를 마치고 이총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면서 “우리 선조들의 억울한 혼을 기리고 그 한을 잊지 않는 역사의 교육현장으로 삼아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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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시 선진리 조명군총 옆에는 일본 교토 이총에서 채취한 흙은 봉안한 이총기념비가 있다.


이총은 분명 우리에겐 치욕의 현장이고, 다시는 없어야 할 역사의 교훈으로 다가온다. 이총은 일본에서도 그 시대에 따라 존재의 의미가 변했다. 많은 이들은 이총이 일본의 사적지라고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는 사적지로 볼 수 없다.

이총의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 이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무덤은 16세기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이른바 분로쿠 게이초의 역(한국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1592~1598년)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적군의 목 대신에 조선 군민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져왔다. ~(중략)’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써 막을 내렸으나 전란이 남긴 이 귀 무덤(코 무덤)은 전란 하에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교토시



안내판에는 사적 호코지 절 석축 및 석탑(1969년 4월12일 지정)으로만 기재하고 있다. 어디에서도 이총이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는 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총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다. 정권의 안정을 위해 조선과의 평화를 원했던 그는 통신사의 파견을 수차례 요청했다. 일본을 찾은 조선통신사가 교토를 지나갈 때는 통신사 일행이 보지 못하도록 무덤 전체를 천막으로 가렸을 정도다.

도쿠가와 정권에서 방치되던 이총은 1898년 메이지시대에 들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재단장됐다. 군국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메이지시대에 이총은 일본의 힘을 자국민에게 과시하는 선전자료로 활용됐다. 이총의 그림이 있는 우편엽서까지 발행됐다.

이총의 현장에는 아직도 이총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선을 알 수 있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15년 이총은 다시 한 번 재정비된다.

이총의 담벼락에는 당시 돈을 헌금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정말로 이들은 조선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헌금을 했을까. 사연을 알고 보면 ‘아니다’에 가깝다. 교토는 일본의 가부키 문화의 발상지다. 일본의 가부키는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룬 소재가 많다. 가부키는 큰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총의 담벼락에 적혀 있는 이름들은 주로 가부키와 관련된 이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을 기리고 치하할 목적으로 기부를 한 것이지, 이총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1915년 이총을 재정비하면서 헌금한 일본인의 명단. 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룬 가부끼와 관련된 이들이다.


일본은 지금 다시 극우정권이 들어서고 있다. 집단자위권을 주창하며 끊임없이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 지금의 일본인들에게 이총의 존재는 과연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까.

일본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총, 그 영혼들이 후손들에게 말하고 있다. 다시는 힘 없는 나라의 비애가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글·사진=최창민·임명진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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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시 선진리성의 전경, 조선의 토성과 일본의 왜성이 결합돼 있어 두 나라의 축성문화를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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