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게 아물어 가는 전쟁의 아픈 역사
더디게 아물어 가는 전쟁의 아픈 역사
  • 최창민/강동현
  • 승인 2014.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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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터전 지리산 둘레길 <17>동강마을∼수철마을
▲동강∼수철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5구간에 해당한다.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에서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를 잇는 11.9km로 5시간이 소요된다. 난이도는 중이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걸으며 산행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걷는 산길로, 함양 휴천면에서 4개의 마을을 지나 산청 땅으로 넘어온다. 경계지점이 점촌마을이다.

동강마을→점촌마을→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방곡마을→상사폭포→쌍재→고동재→임도→수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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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60여명이 희생된 점촌마을 앞 공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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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함양사건 위령탑


▲둘레길에는 아름다운 풍광과 추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7일, 이날은 설날을 하루 지난 정월 초이틀이었다.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은 여느 산촌의 촌락처럼 조용했다. 전쟁이 났다 해도 시골이고 설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낫이나 괭이, 쟁기를 손질하거나 소일을 하면서 올해 새 농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황은 점심을 먹고 난 후부터 달라졌다. 오후 1시 30분경 갑자기 총칼을 멘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마을의 각 집을 돌아다니며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다. 마을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불에 쫓기고 군인에 쫓긴 주민들은 마을 앞 논바닥으로 모두 끌려 나왔다. 그 중에는 어린 아이들과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었다.

군인들은 주민들 앞에서 몇 마디 씨부렁거리고는 남·여를 분리한 뒤 여자가 보는 앞에서 남자들을 먼저 총살하고 뒤이어 여자들을 앉혀 앞산을 보게 한 뒤 이내 사격을 가했다. 주민 60여명은 아무 이유없이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공비와 내통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날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군인들이 산골 주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이른바 ‘함양·산청 양민집단 학살사건’이다. ‘들의 작물을 거두고 가옥을 철거해 적에게 양식이나 쉴 곳을 주지 않는다’는 뜻의 작전명 견벽청야의 미명 아래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당시 기적처럼 살아남은 주민이 그때의 상황을 증언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주민 60여명이 희생된데 이어 유림면 서주, 산청 가현 방곡마을에서 동시에 705명이 억울하게 희생됐다. 또한 거창 신원면에서도 719명이 같은 부대에 의해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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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를 말리고 있는 할머니. 할머니는 “비가 많이 내리는 바람에 태양초를 만드는데 애로가 많았다”고 푸념했다.
▲둘레길 동강∼수철마을 구간에 사건의 현장 점촌마을이 있다. 오전 8시 46분, 동강마을에서 출발해 논길 옆 아스팔트길을 따른다. 집뜰 앞에는 할머니가 붉은 고추를 손질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비가 많이 내리는 바람에 태양초를 만드는데 애로가 많았다”고 푸념했다. 누런빛이 감도는 들녘 벼논엔 잡풀을 손질하는 농업인의 모습이 보인다.

아스팔트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진입도로를 따른다. 추모공원 약간 못 미친 지점의 점촌마을. 왼쪽 개울 옆에 있는 공터가 마을사람들이 집단 학살당한 장소다. 당시의 상황을 알리는 현판을 비롯해 검정빛의 화강암으로 된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조금 더 진행하면 오른쪽 산 언덕에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묘역이 나온다. 2005년 12월 준공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국민은 하늘과 같고 역사는 정의의 편에 있으며 인명은 절대의 가치로 존재해야…. 희생된 영령들이 우리 후손에 남겨주고 있는 진정한 자유와 번영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는 장이 돼야 할 것이다.” 인류의 절대적 가치는 어느 누구도 훼손할 수 없다는 추상(秋霜)같은 명언이다.

최덕신 11사단장 휘하의 9연대는 제주 4·3사태의 진압군이었다. 산청·함양사건은 전쟁 자체의 비인간·비민주성과 지휘관의 어긋난 자부심이 뒤엉켜 발생한 한국 근대사의 비극이다. 시인 문효치의 애도시가 눈길을 끈다.

위령탑을 되돌아나와 무거운 마음으로 아스팔트를 따라 오르면 오른쪽 방곡마을을 통해 공개바위 가는 길이 보인다. 공개바위는 오른쪽 산 중턱에 있는 바위군으로 약간 기울어져서 불안정하게 보여 일명 ‘한국판 피사탑’이라고 부른다. 집채만한 바위 5개가 자연적으로 쌓여 탑처럼 보인다. 바위 주변지역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특이한 현상이다.

둘레길은 공개바위 방향의 아스팔트길을 버리고 왼쪽 개울 쪽으로 향한다. 오봉천을 건너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곧이어 산길과 작은 개울이 함께 진행한다. 계곡은 작지만 아담한 소와 담, 암반이 연이어져 상당한 높이까지 계속된다.

10시 20분, 산 중 깊은 곳에서 폭포를 만날 수 있다. 공개바위 갈림길에서 1시간 길이니 그야말로 심심산중이다. 상사폭포, 2단으로 돼 있는 높이 20m의 대형폭포이다. 중앙으로 쏟아지는 물줄기는 빠르고 힘이 차며 가장자리의 물줄기는 별처럼 반짝이는 물방울을 보석처럼 뿜어낸다. 이 계곡이 자랑하는 최고의 경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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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수철구간 중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상사폭포.


상사(相思)라는 말이 붙은 바위나 폭포의 사연은 사회의 관습, 신분의 제약 때문에 이루지 못한 사랑과 관련이 있다. 인간성이 무시되는 중세의 윤리와 질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 폭포 역시 그런 사연이 깃들어 있다. 어릴 적부터 사모한 여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려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 총각이 이 폭포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한다. 여인은 흉흉해진 소문에 결국 시집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곳에 와서 죽은 총각을 그리워하다 구렁이가 됐다 한다.

폭포를 떠나 조금 더 올라가면 물가에 움막 같은 집이 한 채 보인다. 인적이 없는데 진돗개 한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다. 어쩌다 목줄이 징검다리 돌 사이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사납게 짖어대는 통에 도무지 접근이 어려웠다.

언덕길의 끝 쌍재 부근, 위로 하늘이 살짝 열리는 곳에 비닐하우스 골조를 가진 또 하나의 민가가 보인다. ‘쉬어가시라’는 안내판이 보이지만 정작 주인은 없다. 귀촌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사는 민가이다.

한 등성이를 더 넘어서면 산 허리춤에서 임도를 만난다. 쌍재다. 쌍재는 과거 20∼30가구가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마을이다. 왼쪽 아래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왕산으로 간다. 둘레길은 오른쪽으로 평평한 임도를 따라 진행하다가 다시 오름길이다. 이제부터는 고동재 구간. 한동안 상당한 오름길이 계속된다.

11시 33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얼마나 올랐을까. 사방이 탁 트이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정상석 대신 빛 바래고 낡은 산불감시 초소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 구간에서 가장 높은 고도 664m의 이름 없는 봉우리인데 비로소 사방의 전망이 한눈에 읽힌다.

머리를 들면 서쪽에 5개의 거대한 바위가 겹쳐 있는 함양 독바위가 가장 선명하게 눈에 띈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진주 독바위가 보이고 산너울 한겹 너머 서남쪽에 빼꼼히 보이는 것이 천왕봉이다. 그 왼쪽으로 가락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 성을 쌓았다는 고산습지 왕등늪, 뒤돌아서면 동쪽에 산청읍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시가지를 기준으로 좌측에 왕산과 필봉산, 오른쪽에 웅석봉과 밤머리재다.

664m봉우리를 내려서면 한두 개의 오르내림이 이어지나 큰 오름길은 별로 없다.

낮 12시 14분, 비포장도로 고동재서부터 본격적인 하산길이다. 그러나 공사용 대형 트럭들이 오가고 승용차가 산모롱이에서 소리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기 때문에 산행에 주의해야 한다.

고도를 크게 낮추면 숲속의 언덕 양지 바른 곳에 아름답게 지어진 독일풍의 노이슈반 펜션이 보인다. 이 펜션의 디자인과 이름은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성 중의 하나로 꼽히는 독일의 노이슈반 슈타인성을 본뜬 것이다. 이 성은 1860년대 중반 루트비히 2세의 명으로 만들어졌다. 이어 전원주택과 수(秀)플러스펜션이 차례대로 이어진다.

낮 1시, 작은 개울 건너 몇 그루 당산목이 있는 수철마을에 닿으면 산행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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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슈반 펜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성중의 하나로 꼽히는 독일의 노이슈반 슈타인성의 디자인을 본뜬 것이다. 성은 1860년대 중반 루트비히 2세의 명으로 만들어진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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