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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풀리지 않는 恨]윤동주의 '서시'광복을 눈앞에 두고 떠난 젊은 시인의 詩
최창민/임명진  |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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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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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민 윤동주 (5)
일본 도시샤대학 강의동 건물옆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대학노트와 연필이 꽃이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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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 망덕포구에 세워져 있는 윤동주시비
윤동주 시비는 일본 사립 명문 교토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 내에 있다. 정문을 통과한 뒤 클라크 기념관 주변을 한바퀴 돌고 학교 관계자에게 위치를 물어 본 후에야 현장을 찾을 수 있었다.

강의동 옆 큰 수목이 자라고 있는 공터였다. 직사각형의 화강암 틀에 광택을 낸 흑요석을 박아 넣고 그의 친필 유작, ‘서시’를 새겨 넣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비 앞에는 학생들이 놓은 것으로 보이는 대학노트와 연필, 꽃다발이 있었다. 그 서너발치 옆에 윤동주가 가장 존경했던 시인 정지용시비가 나란히 있다.

백두산 너머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1941년 12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곧바로 도쿄 릿쿄대학을 거쳐 그해 10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일본 전역은 태평양전쟁의 화마가 뒤덮고 있었으나 윤동주는 기독교계열인 이 대학에서 송몽규 등 동학들과 수학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한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조국이 누란(累卵)의 위기인데 유학을 하는 게 옳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비극의 검은 그림자는 1943년 초여름부터 다가왔다. 그는 방학을 맞아 송몽규와 함께 모국의 고향을 다녀올 요량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 시모가와 경찰에 잡히고 만다. 과거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한 전력 때문에 이미 ‘요시찰인’으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던 터였다. 지식인으로서 조선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 수호를 선동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재 교토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죄명이 덧씌워졌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됐다. 그러나 1년 후인 1945년 2월, 27세의 젊디젊은 나이에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생체실험으로 사망했다는 의심을 가질수 있는 증언은 송몽규의 면회시 나왔다. 시신을 수습하기위해 일본으로 갔던 윤동주의 부친은 송몽규로부터 의문의 주사를 맞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곧이어 송몽규도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도시샤대학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뒤이다. 이 대학 도시샤교우회 코리아클럽(동문)이 시비건립위원회를 결성해 1995년 2월, 시비가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일본의 여타 국립대학 같았으면 시비건립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다행히 이 대학이 기독교재단인 까닭에 실현가능했다.

일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틋한 연민이 있었을까. 아니면 저들 나라가 저지른 침략전쟁으로 희생된 젊은 천재시인에 대한 일말의 가책이 있어서일까.

현지에서 윤동주 시비를 안내한 김성미씨는 “일부 지식인들이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비를 자주 찾는다. 사상이나 이념을 떠나 인류 공통의 가치인 인간애를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며 최근의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일본에서 윤동주시인을 추모하기 위한 작업들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그가 도시샤대학으로 옮기기 전에 다녔던 일본 6대사립명문 릿쿄대학에도 2006년 시비가 세워졌다. 매년 ‘윤동주 시인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또한 한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윤동주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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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좌)와 정병욱.


▲우리고장 하동 섬진강 지척 광양 망덕포구에서 윤동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아니, 윤동주라는 인물이 세상 빛을 받을 수 있었던 사연이 이곳에 있다.

망덕포구는 섬진강 민물과 남해의 바닷물이 교차하는 기수지역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박춘식씨는 특별한 집을 소유하고 있다.

목조주택인 이 집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 문화재청이 2007년 7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박씨의 집 입구 안내판에 ‘요즘 보기 힘든 1920년대 점포주택이라는 점과 특히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씌어진 민족문학의 귀중한 시집이 두 분의 우정으로 온전히 보존돼 이 나라에 전해지게 된 자리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쉽게 말해 윤동주의 서시가 발견된 집이다. 여기서 ‘두 분’은 윤동주와 정병욱을 말한다.

집 내부에 눈에 띄는 것은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비롯해 당시 정병욱교수의 가옥 모습, 연희전문에서 동문수학할 때 촬영한 윤동주와 정병욱의 빛바랜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그런데 이 원고를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윤동주 자신의 후배이자 아우에게 주는 ‘하늘과 바람과…’원고에 ‘정병욱 형 앞에’라는 글귀가 보인다. 윤동주가 5살이나 적은 정병욱에게 형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정병욱 교수는 생전에 ‘윤동주를 회고하며’라는 글에서 윤동주는 자신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썼다고 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진 것일까. 하동출신으로 명석했던 정병욱(전 서울대교수)은 어릴 적 이곳 망덕포구로 이사를 왔고 유년을 이곳에서 보내다가 서울 연희전문으로 공부하기위해 떠났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윤동주도 백두산 너머 중국길림성 명동촌에서 연희전문으로 왔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인 것이다. 동문수학한 두 사람은 호형호제하며 학업에 정진했다.

평소 시 쓰기를 좋아했던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던 해인 1941년 그동안 써온 시를 모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표를 준비한다. 그러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이를 포기하고 만다. 대신 이 친필원고를 후배이자 절친인 정병욱에게 전하며 보관해 줄 것을 부탁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최창민 윤동주 (1)
일본 도시샤대학 정문.


정병욱 역시 19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불가피하게 이 원고를 고향 망덕에 계신 어머니에게 “중요한 것이니 소중히 보관해 달라”고 당부한 뒤 맡긴다.

아들의 당부를 들은 어머니는 직감한 듯 원고를 이집 마룻바닥 밑에 숨겼다. 일제의 수색을 예감한 때문이었다.

윤동주의 ‘서시’가 정병욱이 유년시절을 보낸 섬진강 망덕포구로 오게 된 사연이다.

광복 후 학도병에서 살아 돌아온 정병욱은 어머니에게서 원고를 건네받았고, 1948년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시집 첫 머리에 그야말로 ‘서시(序詩)’가 있다.

중국 용정의 대성중학교 교정에도 윤동주의 서시 시비가 있다. 이 역시 그를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 발치에서 살았던 젊은 시인 윤동주.

그 맥 한줄기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호남정맥 끝자락 광양 망덕포구에 살았던 절친 정병욱.

어쩌면 ‘서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드라마틱한 사연을 담고 태어날 필연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섬진강변 망덕포구와 중국의 용정, 일본의 도시샤대학 세 곳에서 그의 시비를 보았다.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 일본 도시샤대학의 시비였다. 그에게 가장 억울한 죽음을 안긴, 그들의 나라에 세워진 시비이기 때문이리라.

도시샤대학 정문을 빠져 나오는 길에 한 학생들에게 ‘윤동주 시비를 아느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렇게 묻고 싶었다. 조선에서 온 젊은 시인의 억울한 죽음을 아느냐고, 어두운 시절, 아름답게 빛나는 별처럼 살다간 조선의 청년을 아느냐고.

최창민 윤동주 (2)
정지용시비. 윤동주시비 서너발치 옆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윤동주시비 서너발치 옆에 정지용시비가 있다. 그는 1923년부터 1929년까지, 그러니까 윤동주보다 앞서 이 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한 선배시인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로 시작되는 시 ‘향수’의 작가이다.

시비엔 의외로 ‘향수’가 아닌 1924년 쓴 ‘압천(鴨川)’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압천은 이 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 근처에 있는 가모가와강을 말한다. 그는 이 강을 거닐며 충북 옥천의 고향생각에 젖었다.

마지막에 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은 고향의 풍경과 자신의 처지와 고민을 절묘하게 대비해 표현했다.

그는 1926년 일본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에 ‘카페 프린스’ ‘다알리아(Dahlia)’, ‘산에서 온 새’ 를 발표했다.

한국전쟁 때 중부전선에서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시비는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진 뒤인 2005년 세워졌다.


글·사진=최창민·임명진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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