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속 오백 석불과 함께 오르는 아득한 오르막
상상속 오백 석불과 함께 오르는 아득한 오르막
  • 최창민
  • 승인 2014.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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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터전 지리산 둘레길 <19>성심원∼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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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벌작업을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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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운리구간은 산청군 산청읍 내리와 단성면 운리를 잇는 12.6km의 둘레길로 5시간이 소요되며 난이도는 상급이다.

웅석봉(1099m) 줄기를 넘어가는 코스로 고도를 800m까지 끌어올리는데 웬만한 산 버금간다. 성심원에서 어천마을을 거쳐 아침재, 웅석봉 8부능선으로 갈 수 있고, 성심원에서 어천마을을 거치지 않고 곧장 아침재로 갈 수도 있다.

산 아래 청계저수지 주변에는 화려한 펜션들이 들어서 있지만 과거 호수 안에는 점촌마을이 있던 곳이다.

이번 19회차 둘레길 산행은 성심원에서 출발해 탑동, 운리까지 진행했다. 코스 내에 있지 않은 운리∼광제암문을 별도로 넣어 20회차에 게재할 예정이다.

성심원→아침재→웅석봉 하부 헬기장→점촌마을→탑동마을→운리마을→광제암문

▲‘세속과 연을 끊다’라는 뜻을 가진 단속사는 정유재란 때 불탔다. 748년 창건했으니 춘풍추우(春風秋雨) 850년 동안 영화를 누리다 전쟁으로 폐사됐다. 그로부터 다시 417년의 기나긴 성상 끝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단속사는 대찰이었다. 입구에 미투리를 벗어 놓고 절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 미투리가 썩어 문드러져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 2기의 동서 3층석탑과 당간지주의 위치로 봐서 큰 절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절에서 1km 떨어진 곳에 입구로 추정되는 광제암문이 있으니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영화는 온데간데없고 3층석탑 2기, 당간지주, 길바닥에 기왓장이 나뒹구는, 그야말로 이름처럼 세속과 연을 끊고 오랜 시간 침묵이 지속되고 있다.

영화를 누렸던 단속사의 오래된 과거로 들어가 본다.

솔거는 신라 최고의 화가로 황룡사 벽에 소나무를 그린 인물. 너무 사실적이어서 까치들이 날아와 부딪쳐 뇌진탕으로 횡사한 일이 종종 발생했다. 솔거가 그린 인도 비사리국의 장자 유마힐의 상이 단속사에 걸려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렇게 기록돼 있다. 단속사 창건이 솔거의 시대가 아니니 그의 그림을 옮겨 걸었던 것 같다.

김일손이 1489년 단속사를 다녀간 뒤 속두류록에 소감을 남겼다. ‘누각이 걸작이다. 정원에 정당매가 있다. 절간이 황폐해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 오백 개의 석불은 표정이 각기 달라 기이하다.’

1558년에는 남명도 단속사를 다녀갔다. ‘솔 아래 천년의 절이 창연한데…, 중은 굶어서 부엌이 싸늘하고/금당은 낡아 구름에 파묻혔네./부처 앞 향로에 불이 꺼져 오직 재처럼 식은 마음을 보네.’

김일손은 단속사에서 걸작의 누각, 100개의 방, 오백의 석불을 봤으나, 남명은 부처님 앞이 재처럼 식은 마음이라 했다.

백년도 안 돼 이런 차이가 났으니 단속사는 1500년대에 들면서 쇠락의 길로 들어섰고, 또 100년 후 정유재란 때 잿더미가 돼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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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최고의 경사도를 자랑하는 웅석봉 된비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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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석봉 하부지역 헬리포터
▲오전 8시 24분, 성심원을 출발한다. 뒷산을 어느 정도 오르면 평평한 임도를 만난다. 평길의 여유도 잠시, 다시 오름길과 맞닥뜨린다. 기도의 집, 작고 아담하며 군더더기 없는 하얀 집이다. 어느새 고도가 높아져 발 아래 경호강과 농경지 진주∼산청 간 3번 국도, 뒤로 둔철산이 우뚝하다.

산기슭 곳곳에는 관목 등 자잘한 수목을 간벌하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못마땅한 나무가 있는지 전기톱의 날카로운 엔진음이 높아졌다가 낮아지기를 반복한다.

9시, 아침재.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올라야 한다. 왼쪽 길은 앞서 성심원에서 갈라져 어천마을을 돌아서 올라오는 코스다. 갈림길 나무에 걸려 있는 민박집 이름 ‘흙속에 바람 속에…’. 어? 뭔가 허전한데, 이어령의 칼럼집 ‘흙속에 저 바람속에…’의 줄임이다.

암자처럼 작은 웅석사 앞을 지난다. 절을 비웠는지 인기척이 없다. 곧바로 계곡. 어천계곡의 상류지점에 해당하는 곳이다. 여름의 어천계곡은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도회지 기온이 40도까지 육박할 때 이 계곡은 시원하다 못해 추위를 느낄 정도다. 찬바람이 나오는 밀양의 얼음골이나 동굴처럼 찬 기운이 도는 특이한 지형이다.

이 계곡을 건너서면서부터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 모름지기 둘레길 최고의 된비알이다. 하동 대축∼원부춘 구간 형제봉 줄기를 넘을 때 길고도 큰 경사를 만난 적이 있으나 거기보다 더 큰 경사도를 자랑한다.

깎아지른 듯한 웅석봉의 위용을 실감케 한다. 몇 차례의 휴식과 사진촬영 등으로 시간이 지체되면서 11시 4분이 돼서야 콘크리트가 깔린 넓은 임도에 도착한다. 1시간 30여분 동안 이어진 아득한 오름길의 연속이었다. 그러고도 오름길은 이어진다. 5분여 정도 임도를 따라 더 걸어 올라가면 통나무로 만든 오두막 쉼터가 나오고 임도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오른쪽 눈 위 200∼300m지점이 웅석봉이다. 여기서 둘레길은 왼쪽방향이다. 이때부터 사실상 오르막이 없는 내리막길이다.

11시 40분, 청정한 계곡물이 바위 귀퉁이로 몰려 흐르는 암반에 걸터앉아 선선해진 초가을의 바람을 느껴본다. 한결 높아진 하늘과 구름, 떠다니는 잠자리까지 본다.

임도는 웅석봉 8∼9부 능선까지 뻗쳐 있다. 진주방향에서 멀리 지리산 방향을 바라볼 때 산허리가 잘린 것처럼 흉하게 보이는 것이 웅석봉 임도이다. 가까이서 보니 산모롱이마다 바위들이 부서지고 망가져 흉물스럽다. 뭉텅뭉텅 드러난 산허리는 큰 벼랑을 이뤄서 시도 때도 없이 낙석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구간의 가장 큰 특징은 뱀이 많다는 것. 지금까지 한두 마리 정도를 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곳에는 자그마치 7마리의 뱀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자연이 살아 있는 증거다며 좋아할 일도 못 됐다. 살아 있는 뱀 4마리, 임도로 인한 로드킬이 3마리였다.

특히 마지막에 목격된 장면은 살벌했다. 족히 1m가 돼 보이는 독사와 다람쥐가 생명을 담보로 대치하는 모습이었다. 상위 포식자이자 갑인 독사가 다람쥐를 노리고 있었다. 죽음 직전까지 몰린 다람쥐는 옴짝달싹하지 못하다가 뱀이 인기척에 방심한 틈을 타 찰나의 탈출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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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왔던 웅석봉을 바라보는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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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개설로 망가져 낙석이 진행되고 있는 웅석봉 산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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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3호선과 논
탑동마을. 단속사지에 ‘정당매(政堂梅)’. 수령 650년, 높이 2m, 현존 최고령 매화 중 하나이다. 남명도 보았고 김일손도 보았던 그 매화나무다. 매년 봄이면 특유의 하얀 꽃을 피운다. 그러나 정당매는 안타깝게도 세력이 다해 고사됐다. 옆에 새순이 돋아 자라고 있으나 그 역시 신통치가 않다.

고려 말 진주인 통정공 강회백(姜淮伯·1357~1402)이 단속사에서 공부해 과거에 급제했다. 그가 공부할 때 매화를 심었고 벼슬이 정당문학에 올라 정당매라 했다. 지금의 매화목은 그의 증손 강희안이 다시 심은 것이다. 이런 내용은 강희안의 저서 양화소록에 남아 있다.

분홍빛이 은은한 남사마을 원정공 하즙의 원정매. 산천재에 있는 조식의 남명매와 함께 산청 3매에 속한다.

남명매를 제외하고는 모두 세력을 잃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한때 휴정과 유정이 이 절에 살았다. 남명이 유정에게 준 시가 있다. ‘꽃은 조연(槽淵)의 돌에 떨어지고/옛 절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이별하던 때를 잘 기억해 두게나/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단속사지에는 동서 삼층석탑 2기가 상징적으로 남아 있다. 각각 보물 제72호, 제73호로 지정돼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쌍탑으로 동탑은 상륜부의 노반 복발 앙화 등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으나 서탑은 훼손이 심하다.

1967년 해체 보수할 때 서탑의 1층 몸돌에서 부처님 사리를 보관하는 사리공을 발견했다. 사리장구는 도난당하고 없는 상태였다. 신라계 양식으로 다소의 생략이 보이는 9세기 석탑의 정형이라고 한다.

면류관을 쓴 신라 효성왕과 경덕왕의 벽화가 그려져 있던 금당터에는 민가가 가득 들어차 버렸다. 이곳 아주머니들은 밭을 일구거나 할 때 가끔 기왓장이 나온다고 했다.

200m 앞 송림에 있는 당간지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손돼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1984년 주워 모아 1기를 복원하고 1기는 부분 복원해 놓았다.

영화로웠던 단속사의 과거는 여름밤의 꿈인 듯 상상 속에서 춤추듯 깨어났다가 노을처럼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고는 흙속에 저 바람속에 사라졌다.

최창민·강동현기자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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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 동서 삼층석탑, 단속사의 영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형석탑이다. 석탑 뒤로는 솔거가 그린 유마상을 비롯해 신라 효성왕, 경덕왕의 벽화가 있던 금당터다. 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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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 옆 송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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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m짜리 상위포식자 독사가 다람쥐를 잡아먹기위해 노리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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