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을 떠나 찾은 옛 사람의 바위글씨
둘레길을 떠나 찾은 옛 사람의 바위글씨
  • 최창민
  • 승인 2014.09.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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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터전 지리산 둘레길 <20>탑동·운리∼광제암문




gn20140911지리산둘레길 성심원 운리구간 (162)
웅석봉 아래 청계저수지.


▲탑동마을∼광제암문 구간은 탑동을 제외하고는 지리산 둘레길과는 관련성이 적다. 거리가 2.7km남짓으로 짧기도 할뿐더러 아스팔트도로여서 구간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 그러나 단속사라는 구전 혹은 전설의 명찰과 관계가 있는 ‘광제암문’(廣濟 ?門) 각자(刻字)가 있어 본보 취재팀이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글씨가 예사롭지 않은데 이에 얽힌 사연이나 의미가 무엇인지, 누구의 글인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일반인들은 위치까지 잘 몰라 한번쯤 소개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광제암문 한자 중 ‘암’자는 ‘물건 품(品)’과 ‘메 산(山)’의 합성 ‘바위암’자이다.

▲광제암문의 뜻은 ‘널리 중생들을 구제하는 석문’ 혹은 ‘넓게 깨달음을 성취하는 문’이라는 의미이며, 불교의 이상향 불국토로 들어가는 암문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광제암문 각자(刻字)가 있는 곳은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에서 진주방향 2.7km지점 강변 언덕 암벽이다. 접근하는 길은 두 가지로 용두마을 부근 당산나무가 기점이다. 먼저 아스팔트로 옆 시멘트 농로에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따르면 계곡이다. 계곡을 건넌 뒤 왼쪽방향으로 30여m가면 왼쪽 강 건너 우뚝 선 것이 각자가 있는 벼랑이다.

또 하나는 당산나무에서 시멘트농로를 따르지 않고 곧장 대나무와 숲속의 언덕길을 따라가면 된다. 가을철 잡목과 숲이 들어차 접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강을 건너는 것이 더 좋다. 강가의 풍경이 아름답다.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백색의 암반이 깔려 있다. 이 암반은 오랜 시간 물길의 흐름대로 깎이고 닳아 형성돼 갖가지 자유로운 모양을 갖추고 있다.

드디어 각자가 있는 벼랑, 10m 높이의 암벽 사면에 해서체로 광제암문이라고 새겨져 있다. 첫 인상은 고풍스럽고 비범하다. 가로 70cm, 세로 1m쯤 되는 사각형에다 위에는 삼각뿔, 전체적으로 오각형 모양 안에 글을 새겼다.<사진 참조>

여러 사람들이 탁본을 많이 한 까닭에 글씨부분은 하얗고, 나머지 부분은 이끼와 물때로 탁하고 검다. 어떤 이가 저리 높은 곳까지 올라 저런 글을 새겼을까. 그 사람의 수고와 정성이 기특하다. 아마도 그는 하늘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거나, 아니면 나무계단을 겹겹이 쌓아 올린 뒤 바위에 찰싹 달라붙어 이 글을 새겼을 것이다.

▲500년 전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25세 때(1489년)이곳을 다녀갔다.

/산음을 돌아 남쪽으로 내려와 단성(丹城)에 이르렀다. 지나온 계곡과 산이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니, 모두 두류산의 여운이다.(중략) 단성에서 서쪽으로 15리, 굽은 길을 지나니 넓은 들판이 나왔다. 맑은 시냇물이 그 들판 서쪽으로 흘렀다. 암벽을 따라 북쪽으로 3∼4리쯤에 계곡 입구가 나왔다. 암벽에 ‘광제암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글자가 예스럽고 힘찼다. 세상에는 고운 최치원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5리쯤 가자 대나무 울타리를 한 띠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옆에 뽕나무 밭이 보였다.(중략) 장경판각이 있는데 높은 담장이 둘러져 있었다. 담장 서쪽으로 백 여보를 올라가니 숲속에 절이 있고, 지리산 단속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그는 1489년 4월 지리산을 유람하고 ‘속두류록(續頭流錄)’에 광제암문에 대해 기록했다. 산음(산청)에서 단성으로 왔다가 단속사로 가기 전 넓은 들녘을 지났고 곧장 강을 따라 2∼3리를 더 가 강가 벼랑에서 광제암문 각자를 봤다고 쓰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글을 고운의 친필이라고 전한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도 최치원의 글로 세상에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gn20140911지리산둘레길 성심원 운리구간 (174)
남근석으로 알려진 입석. 개인적으로는 스님의 부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gn20140911지리산둘레길 성심원 운리구간 (176)
광제암문 각자. 고운의 글씨로 알려졌으나 실은 스님의 글이다. 그래도 천년 세월의 강을 넘어 왔다.


실제 신동국여지승람에 ‘(광제암문 암각)은 단속사 지리산 동쪽에 있으며 골 입구에 최치원이 쓴 광제암문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송병선의 두류산기에도 이런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이 글씨는 고운 최치원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 때 이 글을 탁본했는데 기존 것보다 넓게 하면서 네 글자 외에 좌우 이끼 속에 가려진 작은 글씨를 발견한 것이다. 왼쪽 작은 글씨는 ‘통화 13년 을미 4월’, 오른쪽에는 ‘서자 석 혜○ 각자 석 효선’으로 새겨져 있다.

이로 미뤄 이 각자는 고려 7대 왕인 성종 때(995년)스님 ‘혜 머시기’의 글씨이며, 새긴 이는 스님 ‘효선’으로 밝혀진 것이다. 결국 최치원 시대보다는 100여년이 늦은 시기의 각자다.

일부에선 고운이 썼다는 과거 여러 기록물을 들며 그의 글을 100년 후 옮겨 새긴 것이라는 논리도 편다.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타면서 명문이다 싶으면 별 고민없이 그의 글씨로 단정해 버렸던 것이 구전되고 와전돼 오류가 됐다.

하동 쌍계사 입구의 ‘쌍계석문’이 고운의 글씨로 알려진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일 것이다. 쌍계사 경내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가 고운의 글씨이니 이 역시 그럴 것이라는 일종의 연상작용이다. 쌍계석문 각자가 고운의 글씨라는 증거는 아직 없다.

암문의 각자 옆에는 또 다른 글씨들이 남아 있다. 이는 1960년대 말 어느날에 동갑내기인 단성사람들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성씨와 본관을 새긴 것이다.

암문 앞 작은 공터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1m 남짓한 석상이 하나 있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며 빌었다는 남근석이라는데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오히려 스님의 부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입석과도 관계가 있는 듯했다.

암문을 돌아 나와 깨끗한 백색의 암반에 앉아 냇물에 발을 담근다. 가을 초입, 아직은 물이 차갑지 않다. 고개를 들어 벼랑과 파란 하늘을 본다. 불토, 도솔천이 여기다. 산행의 피로가 싹 가신다.

▲속두류록의 저자 김일손

김일손(1464~1498)은 김종직(1431~1492)을 스승으로 삼고 따랐던 인물. 김종직이 1472년 유두류록을 쓴 뒤 김일손이 17년 만에 다시 지리산기행 후 속편 속두류록을 썼다.

실제 김일손은 유두류록에서 천왕봉에 올랐을 때 스승 김종직을 등장시킨다./저물녘에 봉우리의 절정에 오르니 바위 위에 판옥 한채가 서 있다. 그 안에 여석상은 천왕. 지전이 널려 있고 김종직 유호인 성화 임진년(1472)함께 오르다고 쓰여 있다. 예전에 왔던 사람들의 성명을 보니 당세의 호걸들이 많았다./라고 기록할 정도다.

김종직은 본보 지리산 둘레길 16회차 새우섬이 있던 금계∼동강구간 구시락재에서 언급한 주인공으로 김일손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김일손은 1487년 진주향교 교수로 있으면서 진주목사와 진양수계를 만들고 정여창 남효온 김굉필등 사림파를 형성했다.

훗날 사관에 종사했던 김일손은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종직 사후 사초(史草)에 실었다. 이 사실이 당시 정적이던 훈구파에게 노출되면서 연산군의 큰 노여움을 샀다. 이것이 1498년(연산군 4)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다. 문제의 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숙부 항우에게 살해 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글’. 이는 세조(수양대군)의 단종 시해를 에둘러 비판한 글이었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 수십명을 능지처참하고, 스승 김종직도 부관참시하는 잔인함을 보인다.

최창민·강동현기자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지도제공=지리산둘레길 사단법인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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