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보천사지와 대동사지의 보물을 찾아서
(59)보천사지와 대동사지의 보물을 찾아서
  • 경남일보
  • 승인 2014.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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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의 발길 닿는대로
윤위식의 기행
보천사지 수암사
 
요새는 방방곡곡에서 온갖 축제를 하느라 전국이 들썩거리고 도로마다 오고감의 차이도 없이 차량행렬로 미어진다. 축제장은 언저리에서부터 오가는 사람들로 뒤죽박죽이 되어 인산인해 속에 파묻혀서 떠밀리다 보면 사람구경만 실컷 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볼 겨를도 없이 가장자리로 밀려나기 일쑤다. 앞사람의 등짝만 보고도 불만 없이 즐거운 까닭은 축제라는 함께하는 열린 마음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기 때문일 게다.

시월을 맞이한 진주를 두고 한 이야기지만 전국이 이맘때면 매한가지다. 공연과 전시가 어우러지고 난전까지 범벅이 되어 시끌벅적했던 축제의 거리를 벗어나서 한숨 돌리고 싶은 마음에 애환 서린 천년 역사를 오롯이 안은 채 찬이슬 맞으며 노천에 홀로 선 문화재를 찾아 가을 길을 나섰다.

단풍은 아직 이르지만 가지가 휘도록 열린 감이 볼을 붉히느라 가을 햇살을 한가득 안고 담장 너머마다 주렁주렁 열린 지수면 소재지를 벗어나자 남강이 가로지른 들녘은 온통 노랗게 물들었다.

1037번 도로와 1040번 도로가 잠시 만났다가 화양삼거리에서 다시 떨어지는 1037번 도로를 따라 화양리를 벗어나 의령읍으로 향하는 꼬불거리는 산길에는 초입에서부터 억새꽃의 틈새에서 드문드문 피어난 들국화가 가을의 정취를 한가득 안겨준다.

꼬부랑 산길을 넘어서서 하리마을 입구에 닿으면 ‘수암사’를 알리는 표지판에 보천사지 3층 석탑과 승탑을 안내하는 화살표가 좌회전을 하란다. 띄엄띄엄한 예닐곱 집의 마을 안길로 들어서서 작은 저수지를 지나면 기와지붕이 골짜기를 가득 메운 들머리에 반듯하게 드넓은 빈터가 그 옛날의 보천사지임을 우뚝 선 석탑이 말없이 일러준다.
윤위식의 기행
보천사지 3층 석탑

다리가 놓인 도랑 말고는 전부가 평평하게 정비된 빈터인데, 수암사로 들어가는 지붕 없는 불이문 옆으로 보물 제373호인 보천사지 3층 석탑이 가을 햇살 아래 단정한 자태로 우뚝하게 홀로 섰다. 기단에서부터 상대석까지는 우람한 몸집으로 안정감이 돋보이고, 탑신과 옥개석은 간결한 멋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무런 문양도 없는 탑신은 모서리의 기둥만 도드리지게 조각되었고, 옥개석은 밑면을 겹겹의 층으로 정교하게 단을 둘렀는데 추녀 끝은 버선코마냥 날렵하게 하늘을 치받아 그저 깔끔한 맛과 균형의 멋이 어우러져 황홀감이 넘쳐난다. 안내판에는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의 석탑이라는데 천년 세월이 흘렀건만 세월을 건너뛴 듯 빛깔 한 점 변함없이 초연히 홀로 섰다.

3층 석탑에서 아래쪽으로 100여m 떨어진 산기슭의 승탑을 찾았다. 팔각으로 된 3단의 승탑은 기단부터가 돋을새김으로 하단을 받쳤는데, 구름문양과 뒤엉킨 용문양의 돋을새김이 빼곡한 하단과 연꽃잎 문양이 두툼한 가운데층에서 상층부의 옥개석까지 그린 듯이 섬세하고 빚은 듯이 간결하여 중후한 멋까지 품고 있으니 조각예술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는데 지붕 끝 말고는 마모나 훼손된 흔적도 없이 천년 세월을 오롯이 지켜온 보물 제472호 보천사지 승탑이다. 흙으로 빚고 나무로 깎는다 해도 뉘라서 옛 솜씨를 따를 수 있을까. 단아한 기품과 수려한 외모는 보는 이의 넋을 빼는데 천년의 세월 앞에 고작 칠팔십 생애가 촌각인 양 부질없어 알면서도 지은 죄업 불전에 헌향하고 참회라도 할까 하고 수암사로 들어섰다.

오래전 용국사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벽화산 수암사로 개명된 지붕 없는 불이문을 들어서자 길 양쪽으로 헌칠한 키의 관음보살입상이 절문 입구까지 길게 늘어섰는데 삼백서른셋이라서 한참을 걸어야 했다.

과거의 용국사 절집이 어렴풋이 기억나고 심산유곡의 절집이 엇비슷하겠지 했는데 이게 웬 별천지란 말인가. 석성의 문루 같은 천왕문을 들어서자 화강석으로 널따란 마당을 깔고 단청이 현란한 관음전과 극락전이 좌우로 웅장한데 멀리 돌계단 층층대 위로 화려한 단청의 대웅보전이 우람하게 높이 섰다.
 
윤위식의 기행
대동사지 석등과 석조여래좌상


골기와 용마루가 한일자(一)를 길게 늘인 대웅보전을 들어서니 어찌된 영문인지 엄청난 너비의 원형으로 된 법당이 펼쳐졌다. 천장의 높이와 바닥의 면적은 기둥을 헤아려도 가늠조차 어렵고 본존불이 안치된 맞은편 불단이 까마득한데 맨 뒷줄 제일 높은 곳엔 비로자나불을, 그 앞줄 아랫단의 좌우로는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그 앞줄 아래의 좌우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는데, 원형 벽면에는 개금으로 번쩍거리는 조그마한 불상이 천의 열 곱인 일만 불이 조성되어 있어 엄청난 규모가 놀랍기만 하다.

대웅보전을 나와 또 하나의 돌계단을 오르자 층수를 알 수 없는 웅장한 원형건물이 ‘도솔궁’이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납골을 봉안한 법당식의 추모관이다. ‘도솔궁’ 앞에 서서야 대웅보전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팔각의 지붕에 면마다 용마루를 얹어서 마당에서 보면 그저 평범한 기와지붕처럼 보였던 것이다.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리려 하자 종무소에서 맨입으로 보내면 예의가 아니라며 차를 권하기에 종무실장과 찻잔 앞에 마주했다. 속세와 절연했던 시대는 이미 지났고 이제는 중생과 더불어 함께하며 망자의 영혼까지도 영원히 안주할 수 있게 무기한으로 납골안치를 한다며 ‘충효종’으로 새 종단설립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일러 준다.

천왕문 밖을 나와 합장의 예를 갖추고 의령읍을 경유하여 정곡면 중교리의 석조여래좌상을 찾아 차를 몰았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6호인 석좌불은 정곡초등학교 화단 한편에 모셔져 있다. 당초에 미륵골 옛 절터에서 발견되어 옮겨 왔을 땐 나란한 2기의 석불이었는데 어느 양상군자가 한 기를 실어가고 한기만 남은 등신불이다. 인자한 미소가 빼어나게 잘 표현된 석좌불인데, 오른쪽 팔과 겨드랑이 사이를 공간으로 띄어서 생동감이 넘쳐난다.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는데 어쩌다 도반까지 잃으시고 노천에 홀로 앉아 비 가림도 못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내친김에 백암리 대동사지 석등과 석불을 찾아 발길을 돌렸다.

궁류면을 경유하여 봉수면으로 넘어가는 굽이진 산길을 돌아 합천의 대양에서 의령의 신반으로 이어지는 60번 도로와 만나 대양면 방향으로 4km 남짓 가다보면 백암마을 입구에 ‘백암리 석등’을 알리는 표지판이 목을 빼고 섰다. 좁다란 백암리 들녘을 거슬러 올라 상촌마을 입구에 닿으면 상촌저수지 둑이 골짜기를 가로막고 누었는데 그 아래로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에 석불과 석등이 나란하게 우뚝 섰다.

고구마를 캐다 만 밭머리에 차를 세우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메뚜기가 팔딱거리며 앞장서는 논두렁을 따라서 들어섰다. 연꽃잎 무늬의 좌대가 높다랗게 받혀진 위로 양손을 두 무릎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 놓은 석불이 결가부좌의 근엄한 자세로 높이 앉았다. 얼굴의 마모는 심한 편이나 뚜렷한 윤곽이 양호하고 법의의 주름까지도 선명한데 세월의 꽃이 전신에 피어나서 검버섯을 덮어 썼다. 속절없는 세월은 천년을 흘렀건만 잊혀진 향내음 언제 한 번 맡아보며 김 오르는 사시공양 언제 한번 받아볼까.

석조여래좌불 옆에 나란하게 선 석등은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높이다. 하단 받침돌 위로 팔각의 긴 기둥으로 받침돌을 세웠는데, 신라 석등의 경쾌한 특징이라고 안내판이 일러 준다. 부처의 빛을 밝히는 화사석은 네 개의 창을 내고 남은 면은 돋을새김을 한 사천왕상이 두텁게 도드라져서 불끈불끈 힘을 과시하는데 팔각의 지붕돌이 밀반죽을 빚은 듯이 결이 곱고 산뜻하다.

보물 제381호인 석등 옆에는 또 하나의 좌대석이 석주를 꽂고 앉았는데 생김새가 특이하여 쓰임새를 알 수 없다. 가슴높이의 둘레가 4.7m인 수령 천년의 느티나무는 어디 한 곳 삭은데 없이 건재하니 옛 가람의 흥망성쇠를 함께하여 소상히도 알겠건만 오늘도 말없이 석조여래좌상에 해가림을 하면서 언젠가 석등에 불이 밝혀질 날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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