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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풀리지 않는 恨]조선 최고 외교관 유정'인간' 사명대사의 자취를 발견하다
최창민/임명진  |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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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0.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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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민사명대사 정행사 (1)
사명대사 진영을 모시고 있는 쇼코지(정행사). 그러나 취재거부로 진영의 그림자도 못보고 돌아왔다.


▲“돌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 방 안에는 구름이 일지 못하는데 당신은 어디에 사는 새이기에 봉황의 무리에 끼어들었는가.” 유정은 조선의 학문과 문화적 종교적 우월적 위치에서 거침없이 답한다.

“나는 청산의 학이요. 늘 오색구름 위에만 놀았는데 하루 아침에 운무가 사라져 야계의 무리에 떨어졌소이다”

유정의 대담한 배짱과 칼날 같은 선기에 도쿠가와는 움찔했다. 일본 지도부와 전범들을 닭무리에 비유한 말에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을 것이다.

유정(惟政·사명대사·1544∼1610년)이 일본의 최고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0)와 처음 만나 주고 받은 필담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4년 2월 조정에서 선조가 내린 강화사절단수장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시대가 끝나고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가 조선에 화친정책을 펼치자 조·일간 전후 처리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사절로 간 자리였다.

부산→대마도→시모노세키→오사카로 이어지는 항로의 여정을 따라 교토로 간 사명대사는 후시미죠(伏見城)에서 도쿠가와를 만나 성공적인 외교활동을 펼쳐 3000여명의 조선인 포로를 귀국시킨다.

조선 최고의 외교사절단 명성이 그에게 붙는 순간이다. 그리고 조·일간 300년간 지속되는 평화수교협약을 맺는 성과를 올린다. 삼일정승이란 말은 선조가 그의 능력을 인정해 영의정에 제수한 뒤 3일만에 사임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사명대사는 밀양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김천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을 찾아가 승려가 된 뒤 18세때 불교 승가시험인 선과에 장원급제 했다.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 휴정(서산대사)을 만나면서 삶이 완전히 바뀐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산대사 휘하에서 각 지역의 승병을 모집하고 선봉이 돼 호국에 나선다. 평양을 탈환하기도 하고 권율과 합세해 왜군을 격파한다.

1594년 울산 서생포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몇차례 만나 조선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일갈하며 쟁변과 담판을 벌였다.

그리고 조·일간 평화수교협약을 위해 일본엘 다녀왔다.

1610년 해인사에서 입적했고 표충사에 배향됐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땅과 물, 불과 바람으로 이뤄진 이몸은 허망하다. 이제 나는 진(眞)으로 돌아간다. 대자연의 큰조화에 순응하려 한다.” 고 했다.

해인사 홍제암에 그의 진영(眞影)이 있고 행장이 담긴 비석이 있으며 표충사에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그린 ‘일본상륙행렬도팔곡병’이 있다. 제천 신륵사 극락전에서 ‘사명대사행일본지도’가 발견되기도 했다.



최창민사명대사 정행사 (6)
쇼코지(정행사) 본당 정문.
임명진 혼묘지 (5)
이케카미 혼묘지(본묘사) 주지스님일행이 취재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이번 취재는 임진왜란 이후 300여년간 조·일평화시대를 여는데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일본 내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유묵과 진영을 보관하고 있는 일본 내 두지역의 사찰을 취재하기위해서다.

이는 최근 한·일간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갈등과 반목에서 벗어나, 어떻게 평화시대를 열어야하는가에대한 과제를 조금이나마 역사 속에서 더듬어 보는 의미이기도하다.

굳이 서두에 법명 ‘유정’이라고 쓴 것은 그의 호 사명당, 즉 ‘사명대사’가 지나치게 신격화돼 있어 이로인해 그에 대한 평가가 격하되는 것을 덜기 위함이다. 불과 400년 전에 현실에 존재하며 조·일간 평화시대를 열었던 유정이, 사명대사라는 이름으로는 도인, 기인으로 각인케 된 것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비현실성이 덧씌워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사명대사를 골방에다 가두고 며칠동안 불을 지핀 뒤 방문을 열어 봤더니 수염에 고드름을 주렁 달고 있더라’는 얘기다. 그의 정확한 이름은 ‘사명당 송운대사 유정’(泗溟堂 松雲大師 惟政)이다.

▲평화수교협약을 위해 일본으로 갔던 사명대사의 흔적은 크게 두곳이다.

큐슈 후쿠오카시 소재 작은 사찰 ‘쇼코지’(正行寺)와 큐슈 구마모토시 소재 ‘혼묘지’(本妙寺).

먼저 쇼코지. 아악당 정면에 사명대사진영이 걸려 있다. 진영이 걸린 이유는 통도사 주지를 지냈던 정우스님과의 인연 때문. 쇼코지측이 최근 사명대사의 발자취를 연구해 책을 출간하고자 했고, 정우스님은 한국 내 사명대사의 발자취를 찾아 자료를 제공하면서 책이 출간됐다. 일본에서 사명대사의 도서가 출간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를 계기로 사명대사 진영이 쇼코지로 보내져 아악당에 모셔졌다.

앞서 통도사측은 통도사 금강보탑을 작게 축소한 미니어처를 쇼코지에 보내기도 했다.

쇼코지는 임란 후 갈래 갈래 찢어졌던 한·일관계를 회복하는데 일조한 사명대사의 큰 뜻을 기리고 있는 사찰이라고 할수 있다. 이 곳에는 퇴계 이황 현창비도 세워져 있다. 퇴계의 사상에 매료된 쇼코지측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런 순수한 바탕에서 이어진 한·일간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취재팀은 쇼코지 그림자만 쳐다보고 올수 밖에 없었다.

사명대사진영과 퇴계의 현창비를 모신 이유, 앞으로 한·일간의 관계 회복을 위해 지식인들이 가져야할 자세 등 사전 취재요청에도 그들은 이를 거부했다. 의례, 의사소통과정에서 빚어진 오해로 판단했으나, 현지에서 재차 요구한 요청도 거부됐다. 쇼코지측의 거부 이유는 대략 이런 것이었다. 우호적인 한·일관계를 위해 한국의 표충사 통도사와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는데 굳이 언론인들이 찾아와 미묘한 것까지 들추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미묘한 것이라면 사리의 분과라든지 혹은 일본 불교문화의 정체성 등을 들수 있다. 또 하나는 극도로 경색된 한·일관계 때문으로 보여졌다.


임명진 혼묘지 (8)
사명대사 유묵과 이순신장군 칠언시 하동인 여대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절 혼묘지(본묘사). 사진은 사찰 입구 석등이다.
임명진 혼묘지 (10)
사명대사 유묵과 이순신장군 칠언시 하동인 여대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절 혼묘지(본묘사)사찰 건물.


▲어이없는 상황은 사명대사의 다음 일정 취재를 위해 구마모토 소재 혼묘지(本妙寺)를 방문했을 때 벌어졌다.

이케가미주지스님에게 정황을 설명하자 “미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면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랬다.

혼묘지는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176개의 급경사 돌계단을 올라야한다. 중앙에 크기와 형태가 다른 수백기의 석등이 줄지어 서 있다. 본당 앞에서 내려다보면 구마모토시가 보인다.

건물 앞에 삼각형모자를 쓰고 창을 들고 서 있는 동상이 가토 기요마사다. 석단 꼭대기에는 그를 모신 조치보(정지조)가 있다.

가토 기요마사. 알려진대로 진주성에 쳐들어와 성을 지키던 군사 등 진주시민 6만명을 살해하고 몇년 뒤 다시 울산으로 가 울산성에 갇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퇴각한 왜장이다.

그런데 그가 왜 이곳에 있을까. 그리고 왜 이곳이 사명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부친 기요타다공이 쇼코지를 설립했고 가토가 죽은 후 이곳에 안치된 것이다.

이 혼묘지에 사명대사가 썼다는 유묵 몇점이 남아 있다. 가토의 영역에 사명대사의 유묵이라니 또 한번 놀랄 일이었다.

이케카미 혼묘지 주지스님은 “사명의 유묵이 혼묘지에 있는 것은 초대주지 니씬(日眞)스님과 사명대사의 인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주지는 “1594년 임진왜란 중에 울산 서생포왜성에서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가 전쟁 관련 회담을 가졌고 이때 훗날 혼묘지의 초대주지가 된 니씬스님이 가토와 함께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회담할 때 사명이 니씬에게 유묵 북해송운일진사(北海松雲日眞辭)와 북해송운법어(北海松雲法語)를 써 준 것이다”고 했다.

이케카미 주지스님은 인터뷰 중 북해송운일진사 관련 자료를 내보였다. 자료를 촬영하려하자 스님은 제지하며 신문에 게재할수 없다고 했다. 웃음을 띠었지만 더 이상 사진촬영이 불가능한 분위기였다. 전재료때문이었다.

취재팀도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전재료가 지나치게 비싸다고 생각됐기에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료의 필요성은 국내에 돌아간 뒤 판단하겠다고 한뒤 관련자료를 보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뒷맛은 그리 개운치 않았다.

이 절에는 사명대사의 유묵 외에도 임진왜란 시 가토 군사에 끌려오거나 자청해 온 두사람의 흔적이 있다.

주지스님은 “그 중 한명은 조선의 하동사람 ‘여대남’이며, 그는 임란 당시 13세였고 하동 쌍계사에서 정진했었으며 가토의 군에 이끌려 일본으로 왔다”고 했다. 그는 “스님은 총명할 뿐 아니라 지 덕을 갖춘 호인이었고 훗날 이 사찰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성장해 혼묘지의 3대주지(일요스님)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의 한국명은 여대남이지만 이곳에선 일요스님으로 통했다. 이 사찰에는 고향인 하동 양보면에서 부친이 보낸 서신이 보관돼 있다.

스님은 “일요스님은 말년에 일본에서 갑자기 사라졌으며 하동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다 생을 마쳤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또 한명은 언급하기 껄끄러운 김환(金宦)이다. 그는 가토가 좋아 자청에서 일본으로 따라왔고, 가토가 죽자 그를 따라자결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사찰에는 이순신장군의 친필 칠언시(七言時)와 끌려간 임해군의 한시도 보관돼 있다.

이케카미혼묘지주지스님은 한국민에게 사과했다. 취재팀을 처음 만났을 때 “과거의 잘못을 대신해 정중히 사과한다”며 허리를 90도 숙였다. 스님 일행은 취재팀이 혼묘지를 떠날때까지도 친절했다. 차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현지에 20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 가이드는 “일본인들의 몸에 밴 친절이며 진정성은 알수 없다고 했다” 고 했다.

그래서일까. 혼묘지에 남아 있다는 1000여점에 달하는 우리 문화재의 실체가 자꾸 생각이 났다.

<끝>

임명진 혼묘지 (20)
사명대사 유묵과 이순신장군 칠언시, 하동인 여대남(일본명 일요스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케가미 혼묘지(본묘사)주지스님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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