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위식의 발길 닿는대로(62)영원사 가는 길
윤위식의 발길 닿는대로(62)영원사 가는 길
  • 경남일보
  • 승인 2014.12.1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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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담
지리산 정상에 하얗게 눈이 왔다. 아파트 뒤쪽 베란다에 서면 중중첩첩으로 포개진 물결모양의 산들이 가물거리는데 오히려 스카이라인의 정점에 있는 지리산의 천왕봉이 더 또렷하게 보이는데 오늘 아침엔 하얗게 눈을 덮었다. 불현듯 지리산의 오지 산사 영원사가 생각나서 서둘러 길을 나섰다. 당장이라도 날이 궂어 산 아래에까지 눈이 온다면 내년 삼사월까지는 오도가도 못하는 고산심처라서 지리산 눈바람이 골짜기 아래로 불기 전에 서둘러야 하는 첩첩산중 절집이다.

35번 고속도로 생초IC에서 차를 내려 경호강으로 흘러드는 엄천강을 거슬러 올라 산청의 화계장터에서 엄천교를 건너 천왕봉로인 60번 도로는 함양의 유림삼거리에서부터 인월로 이어지는 지리산관광도로로서, 굽이굽이 이어지는 그림 같은 절경 속에 애환 서린 역사의 숨결이 곤하게 잠들어 있는 비경의 탐방로이다. 역사의 향기는 엄천강이 시작되는 곰내들을 돌아들면 강변길의 굽이마다 비운의 역사가 옛 세월을 뒤돌아보게 하여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길이다.

바쁠 것 없이 내친 걸음이라 화계장터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여 왕산자락으로 차를 몰아 종묘사직의 패망의 한을 품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조 구형왕의 영정을 모신 망자의 궁궐인 덕양전과 한국의 피라밋이라는 구형왕릉을 찾았다. 왕조에 지은 망국의 죄업을 갚을 길이 없어서 흙 한줌 올리지 말라는 유언에 따른 돌무덤은 울창한 수림 속에서도 칡넝쿨 한 가닥 범하지 않고 가랑잎 한 잎 구르지 않으며, 산새도 능의 위로는 날지 않으니 만조백관 어디 두고 첩첩산중 돌무덤에 홀로 묻힌 왕에 대한 마지막 충정일까. 아니면 애달픈 사연에 미물도 애끓어서 감히 범접하지 못함일까. 긴긴 역사 속으로 깊이 잠든 가락국! 길손은 웅장한 석총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예를 갖추고 홍살문을 나와 엄천강을 건너 함양땅으로 들어섰다.



 
용유담 포트홀 바위


강을 거슬러 오르며 남호삼거리에 닿으면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조선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사림파의 사조이신 점필재 김종직 선생께서 당시 함양군수로 재직하며 녹차의 공납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려고 관영으로 조성했던 옛 녹차밭에 목민관으로서의 선생의 업적을 찬양하는 웅장한 빗돌이 섰다. 조의제문으로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하고 유자광이 함양을 찾아 글을 지어 손수 건 주련을 불살라버린 선생의 지조가 훗날 무오사화의 불씨가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게냐만 부관참시의 비통한 굴곡진 애사를 돌이켜 보게 한다.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절의는 개밥 주고 지조는 밑씻개고 영달을 위해 암투하고 보신을 위해 머리만 조아리는 대조되는 작금의 현실이 너무도 부끄러워 빗돌 앞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저물어 가는 한 해를 새김질하며 을미년의 새 길을 묻고자 나선 길이지만 발걸음이 무겁다. 강섶을 물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구 밖을 가로 막은 낙엽 진 느티나무와 노송의 숲속에 ‘나박정’이라고 음각된 빗돌 옆으로 거북등을 기단으로 삼은 커다란 비석은 ‘전주이씨 세종왕자 한남군 충혼비’라 새겨져 있다. 천륜을 도륙하던 세조의 칼끝은 천리 유배지인 이곳 새우섬에서 살육만은 간신히 비켜갔건만, 비분강개의 혈루로 오지랖을 적시다 병약하여 세수 삼십으로 순절하였으니, 왕자의 군호를 딴 한남마을 성황단 돌탑은, 비운의 역사 속에 피눈물이 이끼가 되어 무성히도 얼룩졌고, 한남군의 유배지였던 새우섬은 강물의 흐름에 지형까지 바꿔져서 산자락의 발치가 되어 휘감고 흘러가는 강물에 젖어 있다.

국토교통부가 댐을 막고 싶어 식수댐이니 홍수조절용이니 하며 안달을 하는 문정으로 접어들면 짙푸른 엄천강은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간간이 소를 만들며 태고의 자연을 오롯이 간직한 기암괴석들로 장관을 이룬다. 송전마을로 건너가는 용류교 아래는 수심이 깊어 물빛은 더욱 짙푸른데 물 가운데 떠 있는 커다란 자라바위는 새끼까지 거느리고 콩알 반쪽도 나눠 먹던 옛사람들을 그리며 유아독존적인 인정머리 없는 현대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광욕을 즐기는지, 아니면 그 옛날 달궁사 옆 돝못에서 살다가 가을이면 이곳 용류담으로 내려와서 봄이면 다시 돝못으로 올라간다는 스님의 가사를 걸친 모양을 닮은 ‘가사어’를 기다리는지 길게 목을 늘이고 꿈쩍도 않는다.



 
영원사


용류담 위쪽은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빈틈없이 빼곡한데 그 크기가 하나같이 웅장하다. 예닐곱 명이 들어앉아도 될 것 같은 가마솥 같이 옴쏙하게 파인 바위하며 항아리 속 같이 밑이 더 넓게 파인 바위가 있는가 하면 둘이 붙어서 땅콩 속 같은 바위도 여럿이다. 강물의 소용돌이가 억겁의 세월을 두고 만들어 낸 비경이라지만 청자나 백자를 굽던 도공의 솜씨인들 이토록 매끄럽게 빚을 수가 있을까. 아홉 마리의 용이 노닐었다는 신비한 절경을 문화재청은 국토교통부의 눈치를 보는지 명승지 지정을 유보하고 있다. 손괴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이루려면 수천 년이 걸려도 될까 말까다. 보고 또 봐도 신비로운 절경을 뒤로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마천면 소재지의 들머리에 닿으면 오른쪽 산길로 이어지는 도로가 등구마천 오도재로 넘어가는 길이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 증조부이신 가락국 구형왕이 오백년 도읍지를 되찾기 위해 은거했던 등구사에서 황후 계화부인은 매일 같이 고갯마루에 올라 천왕봉을 향해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을 달라며 왕조의 재건을 빌고 빌던 성황당 고갯길이며, 서산대사는 승병을 이끌고 넘던 길이고, 변강쇠는 나뭇지게를 지고 쉬어 넘던 길이며, 소박데기는 눈물 젖은 보따리를 안고 돌아보며 넘던 길이고, 야심한 밤이면 화적떼가 숨죽이고 넘던 길이지만,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유호인 최익현 남명 등 시인묵객들이 지리산을 찾아 수도 없이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꼬불거리는 오도재 고갯길을 뒤로하고 마천 오일장터를 지나 벽소령 가는 길로 이어진 양정마을 입구에 닿았다. 영원사로 가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은 되었으나 가파른 길은 인공의 손때가 묻지 않은 태초의 모습을 오롯이 지닌 자연계곡을 거슬러 오르며 끝없이 이어졌다. 끊어질 듯 이어진 산길이 멎은 작은 분지에 서너 채의 목조건물이 단청도 마다하고 정적만을 깔고 앉아 지리산의 암자 중에 제일먼저 눈이 온다는 상무주암을 고산준령 영원령 정상 밑에 감춘 듯이 등에 지고, 미륵불의 정토인 도솔천의 한 자락을 건너편에 옮겨와서 울울창창 수림으로 없는 듯이 덮어 놓은 도솔암을 지켜보며, 신령들의 고향인 영원령 깊은 골에 속세와 절연하고 오로지 수행정진만을 위해 통일신라시대 영원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영원사가 그림같이 앉았다.

사계절의 풍광과 변화무상한 풍운조화가 절경이고 비경이라며, 신령의 고향이자 미륵불의 정토인 도솔천이자 선경이라는 주지 현조 스님은, 천이백년 전 창건한 영원조사를 비롯하여 서산대사 청허화상, 사명대사 송운화상 그리고 청담화상 등 일백 아홉 분의 고승들이 수행정진하며 남기신 자필 ‘영원안록’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일러준다. 지금은 입산통제 기간이라서 상무주암과 도솔암 탐방은 후일로 기약하고 법당으로 들어서자 여느 절집과는 달리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소박한데 법벽에 걸린 후불탱화 속의 불보살은 사바세계를 향한 자비의 미소만 가득하게 머금었다.









 
구형왕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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