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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26)<87>수필가 청계 양태석 화백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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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5: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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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26)
<87>수필가 청계 양태석 화백 이야기(2)
 
양태석 화백은 ‘그림은 나의 인생이다’는 수필에서 “내게 그림은 여기가 아니라 행복의 농사짓기 같은 것이다. 나는 농부가 농사를 짓는 기분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그림의 완성은 나에게 가을의 수확과 같은 것이며 행복을 완성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림이 농사처럼 존재의 전부라는 의미로 새겨 볼 수 있겠다.

양화백이 자신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22세때인 1962년에 그린 ‘화조도’다. 창호지를 이용해서 학생용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다. 초기에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미숙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보관해 온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가치로운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얼마전에는 양화백이 33년 전에 그린 그림이 자기 수중에 돌아왔다. 부채 그림으로 옛친구에게 그려 준 것을 아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보내온 것이었다. 낡고 변색된 그림이지만 그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어느 상인이 80년대 작품인 ‘진주8경’ 팔곡병풍을 깨끗이 배접을 한 채 들고 와서 거액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경기 부진으로 그 그림을 사지 못하고 돌려보낸 것이 못내 아쉬웠다는 것이다.

1970년대였다. 당시는 그림을 그리기만 해도 달라는 사람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라 별 걱정도 하지 않고 경주 전시회를 가졌다.경주의 유명 인사인 조인좌 선생의 주선으로 초대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경주에서 두 해 전에 이름 있는 화가가 전시를 했는 데도 두 점밖에 팔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겁이 덜컥 나기도 했다. 그런데도 기적적으로 20점이 팔렸다. 지역 유지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준 전시였다.

작가의 길은 험난했다. 당시는 국전의 위력이 대단히 컸던 시절이라 입선만 해도 알아주었다. 그래서 응당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국전을 했느냐고 물어왔다. 양화백은 그때부터 국전에 출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열심히 국전 준비를 했다. 그는 과거 보는 심정으로 그림을 준비했다. 1년여 고생 끝에 출품한 그림은 경남도전에서의 특선이었다. 그 다음 국전에 도전하여 특선이 되었다. 이로부터 양화백은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진주에서 미술학원을 열었고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제자들이 도전과 국전에 입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난 지방작가는 여전히 지방작가라는 꼬리표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서울 입성이라는 새로운 삶의 세계는 그로 하여금 의지의 불을 당기게 했다. 인사동에 화실을 꾸미고 새로운 시작을 했지만 처음에는 아무도 눈여겨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차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많은 화가들과 교류하는 기회가 늘어났다. 주변으로부터 그의 그림이 알려지면서 그의 머리에 감투가 씌어졌다. 한국산수화회 회장, 성동미술협회 회장은 그 시발점이었다.

미술대전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고문 등은 그로부터 시간이 약간 흐른 뒤에 온 직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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