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갑을담론에 대하여
[경일칼럼]갑을담론에 대하여
  • 경남일보
  • 승인 2015.01.0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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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청 (시인· 진주제일여고 교사)
최근 대한항공 사태는 이전부터 간헐적으로 불거진 우리 사회의 각종 갑질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갑을논쟁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문제는 담론의 흐름이 주로 타깃이 된 갑질에 집중되고 있다. 갑의 무지와 뻔뻔함에 대해 거의 융단폭격에 가까운 공격이 이뤄질 뿐 생산적인 성찰이나 논의로 발전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조금만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의 갑을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한 개인은 관계 속에서 갑이 될 수도 있고 을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갑을관계는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누구나 현재의 위치와 관계없이 갑의 길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교육도 사실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많은 부모들이 ‘맹모삼천지교’를 마다하지 않는 것도, 이에 따라 사교육이 팽창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슈퍼갑의 갑질에 분노하는 우리들이 각자 자신의 삶의 현장 속으로 돌아가면 갑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파트 경비원 분신이나 모 국회의원의 대리운전 폭행사건은 이러한 갑을관계와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슈퍼갑의 갑질에 대해 분노하지만 삶의 현장 속에서 자신이 갑질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사실 정치인들은 대다수 국민, 곧 을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를 말하지만 자신은 갑 중의 갑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 따지자면 국민의 종복이니 국민이 갑이고 정치인은 을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갑질에 대해 분노를 쏟아내면서 정작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혹시 우리들의 이런 분노 속에 자신의 공익적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려버림으로써 망각해 버리려는 심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쟁점이 분출할 때마다 정치인뿐만이 아니라 시민들도 자신의 위치에 따라 각자 목소리를 높이면서 하나같이 을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나름의 근거를 들어 상대방을 질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저렇게 정의로운 분들이 과연 사적인 영역에서도 과연 정의로운가. 사적인 영역에서는 군림하고 반칙을 일삼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 어떤 진영의 입장에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정의를 외친다면 이것은 과연 정의로운 행동인가.

우리는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어느 순간 바로 자기 자신이 갑질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 갑을관계가 반드시 지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상황과 사안에 따라서 갑을관계가 역전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갑질은 복잡한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정당한 갑질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원칙에 따라서 자기 위치에서 정당한 갑의 권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곳곳에서 갑의 횡포가 자심하다. 사회적인 갑의 구조적 폭력에 정당하게 대응하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바람직한 원칙에 따라 정당하게 행동하는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하재청 (시인· 진주제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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