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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28)<89>수필가 청계 양태석 화백 이야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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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5: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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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28)

<89>수필가 청계 양태석 화백 이야기(4)

 

양태석 화백이 쓴 ‘신의 손으로 그린 그림’에는 한국의 대표 기인 화가들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진주와 관련되는 화가 중에 운전 허민(1911-1967)의 이야기가 있다. <운전 허민의 기구한 화업 기행>이라는 제목이다. 이 글을 발췌하여 허민에 얽힌 일화를 정리해볼까 한다.

허민은 경남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 출생이다. 부농의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특히 그림을 잘 그려서 12살 때 일본 지폐를 그려 어린 친구들이 가지고 다니다가 일본 순사에게 들켜 주재소로 불려갔다. 허민이 내가 심심해서 그렸다고 말하자 믿지 못하고 그려 보라 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그리자 순사들도 경탄해 마지않았다. 순사들은 그를 훈계방면해 주었다.

허민은 1924년 12살 때 진주의 해주정씨 집안으로 장가 들었다. 진주를 내왕하면서 신학문에 대한 책을 자주 접했고 연암집과 매천집을 독파했다. 하루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소작료를 받으러 갔다가 소작인들의 어려움을 듣고 소작료를 깎아주는 등 남이 생각지도 않는 일을 해 집안에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허민은 1930년부터 부친의 허락을 얻어 상투를 자르고 그림을 수업하기 위해 서울로 가 해강 김규진 문하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서법과 문인화를 배웠다. 1933년 해강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자 이당 김은호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거기서 배운 서필 채색 기법을 이용한 작품으로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했다.

1937년 국악인 박헌봉과 함께 금강산 유람을 했다. 운전은 절경에 심취해서 스케치를 하고 한시를 지었다. 해금강에서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놀다가 취기가 돌면 이리 좋은 경치에서 죽어야지 하면서 물에 뛰어드는 버릇이 있어 동행인들이 혼줄이 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엔 이리 좋은 날 저승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언덕을 뛰어내리는 사고를 쳤다. 기생들과 동행인들이 붙잡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0년 진주로 와 상봉동에 집을 짓고 화실을 운영했다. 진주는 문인 묵객들이 많았다. 서예가 청남 오제봉, 소정 변관식, 벽산 정대기, 내고 박생광, 풍곡 성재휴, 제헌의원을 지내고 해인대학 학장을 지낸 효당 최범술,파성 설창수 등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설창수 중심으로 창제한 개천예술제 등 주변 환경으로 전국의 예술가들이 진주로 모여들었다.

이때 진주에는 남화풍이 유행하였고 필력으로 일필휘지하는 자리가 자주 마련되었다. 운전 허민은 세필보다 필선이 긁은 남화 쪽으로 성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작품은 화조나 신수가 선이 대담해지고 필력이 강하며 그 회화성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운전은 처음에 쓰던 설파라는 호를 버리고 운전으로 개호했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애국지사들이 모여드는 곤양 다솔사 효당 스님과 교류하는 예인들이 많았다. 김범부, 김법린, 구 상, 조지훈, 김동리, 성재휴 등이 그들이었다. 다솔사에서 해방을 맞은 화가들은 해방기념의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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