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문화재 여행] 남명 조식 유적지
[경남문화재 여행] 남명 조식 유적지
  • 박성민
  • 승인 2015.01.20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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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산천재·남명선생문집책판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0-8에 위치한 산천재(山天齋)는 남명선생이 61세 되던 1561년(명종 16)건립됐고 규모는 정면 3칸, 특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남명선생은 이곳에서 생애 마지막을 보내면서 수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진은 산천재를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 앞뜰 매화나무와 어우러져 있다.


경남 곳곳에는 촉석루를 비롯해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지 등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가 도민들 곁에 남아있다. 선조들이 남긴 유형의 자산인데 눈으로만 보고 스쳐 지나갈뿐 마음속으로 보는 경우는 드물다. 갈수록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본보는 우리 문화재를 통해 선조들의 삶의 지혜 뿐 아니라 삶의 방식을 되돌아보고자 했다. 국가 또는 경남도지정 문화유산을 알아보는 코너를 만들었는데 그 첫번째로 경상우도의 대표적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을 3번에 걸쳐 알아보고 그 발자취를 뒤쫓았다./편집자 주


◇ 치열하게 학문을 실천한 선비

입신양명(立身揚名).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다는 뜻이다. 모르긴 몰라도 조선시대 선비들의 목표였을 것이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고 나랏님을 모셔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것. 그러나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은 달랐다. 비단길 같은 관직을 포기하고 오로지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임금이 청하여 벼슬을 내렸지만 손사래쳤다. 임금을 만나 백성과 난을 다스리는 방도를 전하고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이처럼 정치에 물들지 않은 남명선생의 학문은 뚜렷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성립됐다. 성리학이 비판받는 부분인 이론 논쟁에 매몰되지 않았다. 당대를 함께 살던 퇴계 이황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경의’(敬義, 마음이 밝은 것을 ‘경’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라 함)를 중시해 이를 바탕으로 생활철학을 치열하게 실천했다. 학문을 익히는 것 못지않게 실천력을 강조해 일상도 절제를 이어갔다. 불의와 타협하는 모습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런 부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가장 먼저 일어난 원동력이기도 했다. 남명선생은 사후에도 차례로 대사헌, 영의정에 추증됐고 지금도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린 지식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0-8에 위치한 산천재(山天齋)는 남명선생이 61세 되던 1561년(명종 16)건립됐고 규모는 정면 3칸, 특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남명선생은 이곳에서 생애 마지막을 보내면서 수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진은 산천재를 우측에서 본 모습 안승필 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가 산천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 굳세게 공부하고 덕을 새롭게 한다

멀리로는 눈으로 뒤덮힌 지리산 천왕봉이 아른거리고 발 앞에는 덕천강이 유유이 흐른다. 강변 절벽 위에 돌담으로 경계를 표시한 그 곳. 남명선생이 직접 선택한 자리에 산천재(山天齋)가 자리잡고 있다.

산천재는 행정구역으로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0-8에 위치해 있다. 남명선생이 61세 되던 1561년(명종 16)건립됐고 규모는 정면 3칸, 특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남명선생은 이곳에서 생애 마지막을 보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수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임진왜란때 소실돼 200년 이상 복구되지 못하다가 1817년에 중건됐다. 부속건물로 장판각이 있다. 또 산천재 마루 위 정면과 좌우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산천(山天)은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하는 공간이다. 건물은 서너 칸에 불과하지만 산천재 서북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이 솟아있고 마루에 올라 위를 올려다보면 ‘산천재’라는 현판 주위로 벽화가 보인다. 현재 벽화는 다시 그려진 것으로 신선이 소나무 아래 바둑을 두거나 농부가 소를 모는 등 옛 조상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원래 벽화는 남명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박성민기자 smworld17@gnnews.co.kr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0-8에 위치한 산천재(山天齋)는 남명선생이 61세 되던 1561년(명종 16)건립됐고 규모는 정면 3칸, 특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남명선생은 이곳에서 생애 마지막을 보내면서 수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진은 산천재로 들어가는 길.

남명선생문집책판(南冥先生文集冊板)

산천재 맞은편 남명기념관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된 남명선생문집책판(南冥先生文集冊板)이 보존돼 있다.

기념관 수장고 커다단 철문을 지나 만날 수 있는 남명선생문집책판은 총 185매로 구성된다. 남명 선생의 시문집을 널리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으로 1604년 선조시절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에 의해 해인사에서 간행되었으나 불에 타버려 1622년 광해군 때 관찰사 유영순의 도움으로 다시 간행됐다. 그후 ‘산해사오연원록’,‘연보’,‘언행록’등이 추가로 간행된다. 또 여러 번의 간행으로 생긴 오류를 고치고 수집한 자료를 덧붙여 1894년에 이들 문집을 다시 보완하고 수정해 새롭게 세상에 내놨다. 1897년에는 연보를 수정·보완하여 ‘남명선생편년’을 간행했다.

안승필 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유명한 민암부(民巖賦) 같은 책을 보면 남명선생의 철저한 민본사상이 담겨 있고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며 “이 책판 역시 남명선생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 사상과 생애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라고 말했다.

박성민기자 smworld17@gnnews.co.kr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된 남명선생문집책판(南冥先生文集冊板). 남명선생문집책판은 총 185매로 선생의 시문집을 널리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이다. 1604년 선조시절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에 의해 해인사에서 간행됐다. 사진은 남명선생문집책판 중 하나.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된 남명선생문집책판(南冥先生文集冊板). 남명선생문집책판은 총 185매로 선생의 시문집을 널리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이다. 1604년 선조시절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에 의해 해인사에서 간행됐다. 사진은 남명기념관 수장고에 보관중이 남명선생문집책판이 가지런히 꽂혀져 보관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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