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재 여행] 남명 조식 유적지
[경남 문화재 여행] 남명 조식 유적지
  • 박성민
  • 승인 2015.01.21 16:5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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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덕천서원·세심정
덕천서원(德川書院)은 남명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최영경, 하항 등 사림들이 그가 가르치던 자리에 건립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1608년 현판,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을 받아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았다. 사진은 덕천서원을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남명선생을 기리기 위해 1576년 후학들이 강당 이름을 핵심 가르침을 본받아 ‘경의당’으로 정했다. 현재 경의당의 모습.
산천재를 뒤로 하고 차로 5분남짓, 가까운 곳에 남명선생의 기운이 느껴진다. 경남도유형문화재 제89호 덕천서원. 남명선생이 제자들과 학문을 연마했던 곳이다.

서원에 들어서면 푸른 하늘과 맞닿은 기와지붕은 운치를 더하고 서원을 둘러싼 산새는 눈을 사로잡는다. 그의 학문과 사상의 중심인 경(敬)과 의(義)가 오롯히 담겨있는 덕천서원을 찾았다.

◇세월을 견뎌낸 고고한 자태=덕천서원(德川書院)은 남명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최영경, 하항 등 사림들이 그가 가르치던 자리에 건립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1576년에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소실됐다가 광해군 원년인 1608년 현판,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을 받아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았다.

덕천서원은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고종재위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화을 입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지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사당, 신문, 강당인 경의당(敬義堂)과 동재와 서재, 외삼문 등이다.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남명선생을 기리기 위해 1576년 후학들이 강당 이름을 핵심 가르침을 본받아 ‘경의당’으로 정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던 곳이다. 한때 동재와 서재의 이름을 경재(敬齋)와 의재(義齋)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남명선생의 후학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엿볼 수 있다. 덕천서원의 공부하는 공간이 앞쪽에 있고 사당이 뒷쪽에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서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 남아있다. 경의당 뒤쪽의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가 나오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으로 중앙에는 남명선생의 위패, 오른쪽에는 그의 제자인 최영경의 위패가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남명선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렸으나 최근엔 남명기념관으로 장소를 옮겼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됐다.

◇경의(敬義)란 무엇인가=남명선생은 항상 휴대하던 패검에 ‘경은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고 의는 밖으로 밝고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새기고 다녔다.

그렇다면 남명선생의 핵심사상이라고 하는 경의사상은 무엇일까. 남명선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로 대표된다. ‘경(敬)’은 성인이 되는 수양 방법으로 항상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사에 거짓이 없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을 삼가는 것이다. ‘의’(義)는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실천을 이룩하는 것을 말한다. 또 옳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경의’사상은 조선 성리학의 실천적 학풍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경’(敬)을 바탕으로 외부로 실천하는 행위인 ‘의’(義)를 강조함으로써 완성된다. 남명선생은 방안 벽에 ‘경의’를 크게 쓰소 항상 지침으로 삼았다. 그는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다”며 “시간이 지나고 뻗치도록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 “옛 지식인의 모든 이야기가 이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명선생은 죽음 앞둔 상황에서도 경의를 강조했다. 그는 “경의는 학자에게 지극히 중요하다. 오로지 공부가 원숙해야 한다. 원숙해지면 한 점의 티끌도 마음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며 항상 공부에 힘쓸 것을 덧붙였다. 이처럼 경에 바탕을 둔 정신수양과 의를 기반으로 한 실천정신은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임진왜란 등 국난극복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성호 이익은 “대체로 우도(경남)사람들은 선량하면서도 정의로운데 이는 남명의 기풍을 본받아서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박성민기자 smworld17@gnnews.co.kr



 
덕천서원(德川書院)은 남명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최영경, 하항 등 사림들이 그가 가르치던 자리에 건립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1608년 현판,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을 받아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았다. 사진은 덕천서원을 마당에서 바라본 모습.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남명선생을 기리기 위해 1576년 후학들이 강당 이름을 핵심 가르침을 본받아 ‘경의당’으로 정했다. 현재 경의당의 모습.


“강을 벗삼아 시 한수 지어보세”
사적 제305호 세심정


세심정(洗心亭)은 사적 제305호로 지정된 남명선생의 유적 중 한 곳으로 1582년 덕천서원 유생들의 정자다. 현재 덕천서원 맞은편 덕천강 기슭에 세워져 있다.

세심정에 걸려 있는 기문에 ‘군자는 은거해 수양하며 한가히 거닐며 휴식한다. 대개 은거해 수양하는 곳에는 한가히 거닐며 휴식하는 곳이 있는 것이 옛날 도리이다’라고 세심정을 지은 이유가 적혀 있다. 기록에는 “문밖 시냇가에 2칸으로 세웠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때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고, 임진왜란 후 복원하면서 취성정(醉醒亭)이라는 명칭으로 바꿨다. 또 1815년 중수 후 다시 풍영정(風詠亭)이라 개칭했다고 한다. 1870년 덕천서원이 서원철폐로 훼철되자 다른 곳으로 옮겨 지었다가 1920년대 혹은 193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 지어졌고 이름도 세심정을 되찾았다. 원래 2칸이던 정자는 현재 1칸으로 되어 있다. 세심정이라는 이름은 남명의 제자이자 성리학자였던 하항1538~1590)이 지은 것으로, 주역에 나오는 ‘성인세심(聖人洗心; 성인이 마음을 씻는다)’이라는 문구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다.

박성민기자 smworld17@gnnews.co.kr

 
▲ 세심정(洗心亭)은 사적 제305호로 지정된 남명선생의 유적 중 한 곳으로 1582년 덕천서원 유생들의 정자다. 현재 덕천서원 맞은편 덕천강 기슭에 세워져 있다. 사진은 덕천서원쪽에서 바라본 세심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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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 2015-02-12 15:28:40
정말 굿이예요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이거 홍보해야겠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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