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바로알기 대마도탐방 캠프 <상>
우리역사 바로알기 대마도탐방 캠프 <상>
  • 정영효
  • 승인 2015.02.11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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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땅 대마도

경남도교육청이 주최하고, 본보가 주관한 ‘2014 우리역사 바로알기 대마도 탐방캠프’가 지난 2~4일(1차)과 4~6일(2차) 2차례에 걸쳐 도내 중학생들을 비롯한 인솔교사, 멘토 등 총 168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이번 탐방에 참가한 도내 중학생들은 ‘우리역사 바로알기’라는 주제에 걸맞게 일본 대마도에 스며있는 우리 선조들의 숨결과 흔적을 직접 체험했으며, 특히 나라의 빼앗긴 망국의 아픈 역사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에 본보에서는 (상)배반의 땅 대마도 현황과 (하)경남의 미래세대들이 찾은 우리의 역사를 재조명해 본다./편집자 주
 

▲ 에보시타케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전경



“일본 땅이지만 일본 같지 않고 우리나라 같은 땅, 우리나라의 선조들이 선진문물을 전해주고 통상을 통해 보살펴 주었지만 오히려 일본의 우리나라 침략 전진기지 역할을 한 배반의 땅”

대마도는 일본 본토 보다 우리나라에 더 가깝다 보니, 애증이 교차하는 섬이다. 부산·경남에서 채 120리(49.5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마도는 창원~진주간 거리 보다 더 짧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일본으로 들어가는 큐슈 후쿠오카까지 145km나 돼 일본인들은 찾기 힘든 섬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달음이면 닿을 수 있어 대마도에서는 일본인관광객 보다는 한국인관광객들이 더 많다. 심지어 대마도를 찾는 관광객 모두가 한국인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렇다 보니 대마도에는 한국어가 적힌 안내판은 물론 간판, 흔적들이 즐비하다. 이 때문에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섬이다.

◇현황

일본 본토보다 우리나라에 더 가까운 대마도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딸린 섬으로, 전체가 쓰시마시(市)에 속한다. 시 아래 6개정(이즈하라, 미쯔시마, 도요타마, 미네, 가미아가타, 가미쯔시마)이 있고, 이즈하라에 시청사가 소재하고 있다. 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 수로인 만제키세토(萬關瀨戶)에 의해 상(북섬)·하(남섬) 두개의 섬으로 나눠져 있다. 섬 전체 면적은 708.66㎢로 울릉도의 10배, 거제도의 2배 크기다. 인구는 2014년 말 현재 3만1786명이며, 해마다 줄고 있는 추세다. 지정학적으로 한국과 일본 본토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자연 환경

대마도에는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곳이 많다.

아소만의 산, 바다, 점점이 떠 있는 무수한 섬들, 리아스식 해안은 우리나라 남해안의 절경과 못지않게 아름답다. 일본의 해변 100선에 선정된 미우다해수욕장에서의 천연해변과 에메랄드 빛 바다는 이국정취를 나타내고 있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과 인공으로 조성된 그린파크해수욕장 역시 섬 특유의 자연환경을 자랑하고 있다.

◇경제생활

대마도는 88%가 산지로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문물을 일본에 전달하는 중계무역으로 살림을 꾸려왔다. 지금은 주민들은 주로 어업과 임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인을 상대로 한 관광업이 대마도 경제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진주조개 양식과 와카타 벼루, 타이슈 도자기, 토속주(시라타케, 야마네코), 카스마키(카스테라를 말아 놓은 빵), 오징어, 전복, 소라, 표고버섯, 메밀국수, 로쿠베 등이 특산물로 유명하다.

▲ 미네마치 역사자료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1차 탐방팀
▲ 대마도 일출


◇역사

대마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지리적 조건으로 우리나라로부터 석기·청동기문화를 전래받았으며, 백제·신라·고려·조선시대 때에는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을 답례로 받는 군신관계에 있었다.

고려시대 사료에는 고려 공민왕 때 대마도 만호가 사자를 보내고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마도주의 관직이 고려의 만호라는 고려의 무관직을 사용하고 조공을 바쳤다는 것은 대마도가 고려의 속령이나 속주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1년(1419년)에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했으며, 조선왕조실록 세종편 기록에는 “대마도는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있는 우리나라 땅이다”고 명시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는 옛날에 계림에 속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1949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이었다. 1870년 일본이 무조건 삼킨 것이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무조건 돌려 주어야한다”고 일본에 반환 요구하였으나 한국전쟁 반발로 무산됐다고 한다.

2005년에는 마산시의회(현 창원시의회)가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에 나선 날을 ‘대마도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흔적들

대마도에는 우리나라의 흔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즈하라에 있는 시라기야마(新羅山)와 북섬에 있는 고마야마(高麗山)을 비롯 구한말인 1906년 볼모로 잡혀와 순절한 조선의 마지막 선비 최익현 선생을 추모하는 비석이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다.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와 대마도주 다케유키(宗武志)와의 정략결혼을 알려주는 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개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 조선의 통신사 숙박지였던 세이산지(西山寺),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조선 초 통신사로 대마도에 건너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한 이예(李藝)의 공적비,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비 등이 있다.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사망한 정사 한천석과 부사 박세양 등 113명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한국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정영효기자

 

▲ 2차 탐방팀이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와 대마도주의 결혼봉축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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