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문화재 여행] 남명조식 유적지
[경남문화재 여행] 남명조식 유적지
  • 박성민
  • 승인 2015.02.1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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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남명기념관·남명묘소
▲ 산청군 시천면에 위치한 남명기념관. 남명기념관은 2001년 남명조식 탄생 500주년을 계기로 추진돼 2004년 8월 문을 열었다. 남명선생과 관련된 유물 전시실과 영상정보실, 교육관, 세미나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 남명기념관·남명묘소=순백의 빛을 띤 건물과 탁 트인 공간이 관람객을 품어준다.

산청군 시천면 국도변을 달리면 남명기념관이 펼쳐진다. 남명기념관은 2001년 남명조식 탄생 500주년을 계기로 추진돼 2004년 8월 문을 열었다. 남명선생과 관련된 유물 전시실과 영상정보실, 교육관, 세미나실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매년 10만여명의 사람들이 찾고 있다. 외부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 선생의 석상,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묘인 여재실 등이 있다. 제1전시실은 조식 선생이 실천하는 학문으로 전환하는 데 계기가 된 서적들과 ‘경의검(敬義劍)’, ‘성성자(惺惺子)’ 등 수행과 실천에 관련된 유물들이 진열돼 있다. 제2전시실은 남명의 제자를 주제로 제자들의 유물과 미니어처, 의병활동과 관련한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제3전시실은 남명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한 공간으로 문인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안승필 산청군문화관광해설사는 “분열과 갈등이 계속되는 이 시대가 남명선생을 다시 불러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명기념관은 정신적 유산이 깃든 곳이기 때문에 관람객들이 남명선생의 기운을 느끼고 돌아가셨으면 한다”며 “다양한 연령대 관람객 뿐 아니라 특히 젊은 학생들이 이곳을 찾아주면 더욱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산천재 맞은편 남명기념관 뒤로하고 뒷편 산자락 10분 가량 오르면 남명선생의 묘가 있다 그리 높지 않은 곳이지만 탁 트인 시야로 지리산과 덕천강 품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풍수지리는 알지 못하는 사람도 명당을 한 눈에 느낄 수 있다. 남명선생의 묘소를 비교적 잘 정리돼 있지만 세월을 머금은 묘비는 아직도 한국전쟁 총상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남명 묘소 앞에 서 있는 묘비에는 성운(成運)이 지은 남명의 묘갈문(墓碣文)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남명선생의 발자취는 산청 뿐 아니라 도내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합천 뇌룡정(雷龍亭)은 그가 48세때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뇌룡정은 장자에 나오는 말로서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는 뜻으로 현재 도문화재자료 제129호로 지정돼 있다. 또 남명선생이 30여년 간 강학을 진행했던 도문화재자료 제125호인 김해 산해정(山海亭)도 빼놓을 수 없다.


 

▲ 남명기념관 뒷편 산자락에 자리잡은 남명선생의 묘. 사진은 선생의 묘소에서 앞을 바라본 모습으로 탁 트인 시야로 지리산과 덕천강 품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에 보이는 묘소는 숙부인 은진 송씨의 묘다. 정경부인의 묘는 김해 산해정 앞산에 있다.



◇ 경의검과 성성자=남명선생은 항상 ‘성성자(惺惺子)’라 이름 지은 쇠방울을 차고 다니고 성현들의 초상을 그려 수시로 마주하며 경의검(敬義劍)을 휴대했다.

남명선생을 상징하는 두 유물은 문중의 가보로 내려오다 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됐고 새로운 복원형태로 남명기념관에 전시 중이다. 선생은 이 성성자 방울을 몸에 차고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와 반성을 그치지 않았다. 일생토록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이른바 ‘선비 정신’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가 또 경의검이라는 칼을 품고 다닌 이유는 사욕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면 단칼에 베어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치열한 자기수양과 실천으로 일관했던의 대쪽같은 성품이 두 유품에서 오롯히 새어나온다.

1572년 2월 남명선생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임종 직전에 제자인 김우옹이 스승의 사후 칭호를 무엇이라 할이지 묻는다. 선생은 ‘처사(處士)’라 하라고 답한다. 처사 즉,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평생 벼슬을 멀리하고 오직 학문 실천에 매진했던 그의 삶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이는 듯 하다.

박성민기자 smworld17@gnnews.co.kr

 

남명선생의 묘비. 묘비 곳곳에는 아직도 한국전쟁 총상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남명 묘소 앞에 서 있는 묘비에는 성운(成運)이 지은 남명의 묘갈문(墓碣文)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이 남명선생을 찾을때 보람 느끼죠”
조종명(75)산청군문화관광해설사


 
▲ 조종명(75)산청군문화관광해설사는 남명선생의 14대손으로 남명기념관에서 관람객들을 상대로 그의 생애와 발자취를 전하고 있다.


조종명 산청군문화관광해설사는 남명선생의 14대손으로 남명기념관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성리학은 송나라때 다 완성이 됐다고 한다. 국내에 들어왔을 때도 주자학의 테두리에 벗어나지 못했다”며 “그러나 남명선생은 성리학을 연구하면서도 몸소 실천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은 분이다. 이 부분이 평범하게 책상에서 연구한 여타 학자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조 해설사는 남명기념관에서 근무하는 동안 평범한 일반 생활인들이 강원도, 대전, 경기도 등지에서 내려와 이곳을 찾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남명선생의 학문의 요체는 옳지 못하면 칼을 들고 일어서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며 “선생의 학문은 나약한 사람을 말할 수 있게 일으켜 세우고 염치를 알게해 결국 왜란으로 위기에 처할 때 의병을 발생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남명선생은 국가의 공무원들이 부패하면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다고 언제나 말씀하셨다”며 “이 부부은 지금의 후대에게도 충분한 시사점이 있다. 그분은 일생이 그 자체로 선비였고 특별한 분이었다”고 전했다.

박성민기자 smworld17@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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