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진주답게
진주를 진주답게
  • 경남일보
  • 승인 2015.02.2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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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회 (대한변리사회 회장)
고영회

임진왜란 때 최경회·김시민·고종후 장군들은 시민과 의병 3만여 명으로 그 몇 배나 되는 왜군에 맞서 싸웠다. 전라도에서 고경명 장군이 전사하자 뒤를 이어 최경회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로 왔고, 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다. 2차 싸움에서 고경명 장군의 큰아들 준봉 고종후는 전라도에서 의병 400여 명을 이끌고 와 진주성에서 목숨을 바쳤다. 최경회 후처(관기가 아니다)였던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해 축하잔치에 참여하고 적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꾀어 같이 남강에 뛰어들었다.

진주시민과 의병은 왜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 임금부터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판에 나라를 지킬 의무도 없었던 시민이, 약삭빠르게 셈하여 그냥 항복하는 게 목숨도 구할 수 있었는데, 왜 그들은 목숨을 걸었을까.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가 버텨준 결과 왜군이 전라도를 통해서 북으로 가려는 계획에 크게 차질을 주었고, 조선이 망하지 않는데 큰 구실을 했을 것이다. 진주성 싸움에 성 안팎이 소통하려고 강에 등을 띄운 것에서 지금의 진주유등축제가 시작됐다고 한다. 유등축제가 전국 최고 축제로 자리 잡고 다른 나라에도 수출하는 명품 축제도 자리 잡을 수 있는 데에는 이런 역사가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이 진주이고, 진주다움이다.

나는 1년에 4차례쯤 진주에 간다. 진주 시내를 볼 때마다 진주도 전국 수백 개 도시 가운데 그저 그렇고 그런 도시라는 느낌이 든다.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선조가 살아 면면히 이어온 역사성, 그 역사성이 삶에 배어 있어야 진주답지 않겠는가.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면서 현대의 삶을 포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현대의 삶 속에 진주의 전통이 살아 있는 것, 다른 지역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게 하는 도시, 그것이 진주의 정체성이고 자부심이다. 외지인이 이런 진주를 볼 때 진주를 가슴에 새기고 다시 찾을 것이다.

진주다움을 만들기 위해 한 가지 제안한다. 시내에 달린 간판을 보면 여기에도 외래어가 춤춘다. 간판을 허가할 때 우리글을 먼저, 크게, 왼쪽에 적게 하자. 반드시 한글을 적고 필요하면 외래어를 같이 쓰게 하자. 옥외광고물 관리법에는 간판을 한글로 만들게 되어 있다. 법에 있지만 대부분 지자체는 지키지 않는다. 진주의 정체성은 만들어가는 바탕을 우리글 간판에서 찾아보자.

고영회 (대한변리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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