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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33)<94>경남지역의 문인 등단 50주년 기록자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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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5: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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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등단 50주년 행사에 즈음하여 우리 경남지역 출신 문인들 중에서 등단 50주년을 기록한 분들을 찾아볼까 한다. 경남지역 현대문인의 제일 앞자리는 노산 이은상(1903- 1982) 시조시인이다. 그의 등단 기점을 잡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1921년 두우성이라는 필명으로 ‘아성’4호에 <혈조>라는 시를 발표했고, 1922년에는 <아버님을 여의고>, <꿈을 깬 뒤> 등을 발표한 바 있고, 1924년 ‘조선문단’에 이르러 본격적인 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문단 등단 무렵의 이력사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18년(16세)에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3년(21세)에 연희전문문과에서 수업했다. 그러다가 1925-27년에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부에서 청강했다. 그런 과정을 보면 1922년에 등단한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아직 연희전문 문과 수학 이전이고 또 양주동 박사와의 일본 와세다 시절의 습작 이야기를 감안한다면 1924년 ‘조선문단’을 등단지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여겨진다. 1924년에 데뷔하여 1982년에 돌아갔으니까 만80세에 타계한 셈이고 등단은 58년을 기록한 것이 된다.

이은상은 이 58년 동안 호는 ‘노산’으로 필명은 ‘남천’, ‘강산유인’, ‘두우성’ 등으로 활동했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대학 교수를 지냈고, 동아일보 기자, ‘신가정’ 편집장,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 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는 이어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유치 중에 광복으로 해금되었다. 광복후 이충무공 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 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작품은 가곡에 실리는 행운을 얻어 명성이 작품 이상으로 돋보여진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가고파>, <성불사>, <봄처녀>, <옛동산에 올라> 등 많은 작품이 입과 입을 통해 애창되어 오고 있다. 김복근의 <노산문학관과 은상이 샘에 대한 리포터>에 테너 엄정행의 이야기를 옮겨 놓고 있는데, 얼마나 <가고파>가 이국동포에게까지 애창이 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나는 미국 첫공연으로 노산선생의 가고파 10절을 완창했습니다. 맨 앞줄에 있는 분들부터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노래가 시원찮아 끝내고 가라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박수는 이어졌습니다. 5백여 청중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5분가량이나 계속하여 쳐 주었습니다....”

필자는 이은상 시인을 생애 단 한 번 만나뵐 수 있었다. 1970년 진주문협 총무시절 개천예술제 학술강연으로 초청된 이은상 시인을 여관에서 강연장인 경상대 칠암캠퍼스 강당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맡아 H여관으로 갔었다. 그 자리에는 경남도 G교육감이 인사차 와 있었다. 노산선생께 인사 드리고 있는 걸 보고 있던 그 교육감은 필자를 보고 “어디 근무하느냐?”고 물었다. 필자가 “시내 D고교에 근무합니다.”하니까 “아아, 내 관내로구먼”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때 하루 속히 그 관내를 벗어나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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