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재 여행] 함양 청계서원
[경남 문화재 여행] 함양 청계서원
  • 박성민
  • 승인 2015.03.04 1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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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필(直筆)의 강직한 기개 이곳에 있다
도문화재자료 제56호인 청계성원은 남계서원과 가까운 곳이 위치하고 있다. 사진은 청계서원에 들어가는 정문으로 앞에 홍살문이 서 있는 모습이다.


◇ 자연과 조화로운 ‘청계서원’

청계서원은 남계서원을 둘러본 뒤 몇 발짝 옮기며 찾을 수 있다.

남계서원과 같이 웅장한 자태는 아니지만 소박한 크기의 아늑하고 포근함을 주기 충분하다. 세월을 간직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원 안 곳곳에 있어 건물 자체가 한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그 조화로운 모습은 서원도 자연의 일부라고 느껴진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청계서원은 도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1907년에 청계정사가 있던 터에 세워진 것으로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 1464~1498)을 위해 만들어 졌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요직을 두루 지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희생됐다. 그가 이곳에 청계정사에서 한동안 공부를 한 적이 있어 유림에서 그 터에 서원을 세운 것이다. 서원의 건물은 중앙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이 있으며 그 뒤쪽 높은 지대위에 묘우인 청계사가 있다.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인 ‘구경재’와 서재인 ‘역가재’가 있고 경내에는 김일손을 기리는 비석과 네모난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청계서원은 김일손이 1495년 청계정사를 창건하고 공부하던 곳이었으나 그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폐사됐다. 그후 그를 추모하던 유림들이 1906년 재건을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해 1917년 남계서원으로부터 대지를 기증받아 묘우를 비롯 강당과 부속건물 유적비 건립했다. 1921년 준공돼 그해 2월 16일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청계서원이라 헌액돼 지금까지 내려고 있다.



 
청계서원은 남계서원과 크고 넓은 모습은 아니지만 소박한 크기의 아늑하고 포근함을 주기 충분하다. 세월을 간직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원 안 곳곳에 있어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진 너머로 청계서원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청계서원은 김일손이 1495년 청계정사를 창건하고 공부하던 곳이었으나 그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폐사됐다. 그후 그를 추모하던 유림들이 1906년 재건을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해 건립됐다. 사진은 청계서원 중앙 강당의 모습.
◇ 직필사관 ‘김일손’

김일손은 사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464년(세조 10)지금의 경북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문하로 들어가 1486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다. 그후 1년 뒤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해 정여창, 남효온, 홍유손, 김굉필, 강혼 등과 교유하면서 사림파의 입지를 굳건히 해 나갔다. 특히 김일손은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정자, 검열, 주서, 정언, 감찰, 지평 등 언관과 사관의 핵심 요직을 맡으면서 언론기관에서의 남다른 강직함과 선비다움을 뽐냈다.

그는 또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림파의 젊은 기수로 훈구파에 맞서 현실 개혁에 대한 의견도 나타냈다. 새로운 사상과 정치이념으로 무장한 김일손은 적극적인 언관과 사관 활동으로 부조리한 모습을 두고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3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사초에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사안을 거침없이 적은 것과 김종직의 ‘조의제문(吊義帝文)’, 세조 재위시 신임받던 신하의 비리를 폭로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강직한 기개는 후대 조광조에게도 이어졌고 결국 네 번의 사화라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림파가 조선 중·후기를 지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한편, 그가 처형을 당할 때 냇물이 별안간 붉은 빛으로 변해 3일간을 흘렀다고 해서 ‘자계(紫溪- 붉은 시냇물)’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의 고향인 경북 청도에 있는 자계서원의 이름은 이렇게 유래됐다.

박성민기자 smworld17@gnnews.co.kr



 
청계서원의 건물은 중앙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이 있으며 그 뒤쪽 높은 지대위에 묘우인 청계사가 있다.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인 ‘구경재’와 서재인 ‘역가재’가 있다. 사진은 서원 마당에서 중앙건물을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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