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퇴계 500년만의 아름다운 동행
남명-퇴계 500년만의 아름다운 동행
  • 이홍구
  • 승인 2015.03.1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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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학파 양대산맥…동갑내기지만 생전 만나지 못해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이황.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들이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김관용 경북도지사의 주선으로 500년만에 손을 맞잡고 우리들 앞에 다시 우뚝 섰다. 경남도와 경북도가 이들의 사상적 가교를 마련한 것은 선현의 지혜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 해법을 찾기위해서다. 역사책에서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울림으로 되살아나는 남명과 퇴계, 그들의 사상과 현대적 의미를 재조명한다.



남명 조식(1501~1571년)과 퇴계 이황(1501~1570년)은 조선성리학과 영남 유학을 대표하는 거목이다.

남명과 퇴계는 나이가 동갑이었다. 1501년에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두 명이나 태어난 것이다. 이황이 71세로, 조식이 7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둘은 완벽하게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신만 왕래했을 뿐 생전엔 만나지 못했다.

16세기 사림(士林)이라 불리는 지식인들을 대표한 것이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이다. 두 학파는 지리적으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뉘어져 있어 각각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했다.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실천적인 학문을 주장했다면,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성리학을 이론화했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퇴계는 ‘인(仁)’을 중시하며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발전시켜 나갔으며, 남명은 직선적이며 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재야의 비판자로 ‘의(義)’를 숭상한 것이다.

남명 조식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일생토록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이른바 ‘선비 정신’을 실천했다. 그의 학문과 실천의 지표는 ‘경(敬)’과 ‘의(義)였다. 이를 실생활에도 옮겨, 몸에 차고 다니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을 새겼다. 임종 직전에 제자인 김우옹이 스승의 사후 칭호를 무엇이라 할것인지 묻자, 조식은 ‘처사(處士)’라 하라고 답했다. 진주권 지리산 아래에서 영남 우도의 학통을 이끌었던 남명은 제자양성을 통하여 그의 실천적인 학문을 계승시켰다. 임진왜란 당시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등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것도 그의 실천적 학풍이 작용했다. 하지만 제자 정인홍이 인조반정(1623년)으로 처형되면서 남명학파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민본(民本)을 바탕으로 한 남명 조식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1862년 진주에서 민란이 발발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안동권 소백산 아래에서 학통을 이끌었던 퇴계는 정계에도 진출했다. 그는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하는 자연주의자였지만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3번 낙방한 뒤 33세에 문과 급제해 37년간을 벼슬살이를 했고, 우찬성에 양관대제학까지 지냈다. 퇴계는 이후 동방의주자라고 칭송될 정도로 성리학의 이론분야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성리학을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완성해 조선중기 학문과 사상의 기틀을 잡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선비들이 남명과 퇴계를 두고 평하기를 ‘이황은 온화하고 포근한 청량산을 닮았고, 조식의 우뚝 솟은 기상은 지리산을 닮았다’고 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는 ‘중세 이후에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했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웠다’고 했다. 이익은 남명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기개와 절개로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제자들이 여기에 영향을 받아 정의를 사랑하고 굽히지 않는 지조를 지녔다고 했다. 반면 퇴계의 제자들은 깊이가 있고 겸손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경모하며, 때론 건전한 지적으로 유학 발전에 기여했다. 퇴계가 ‘남쪽의 영남 땅을 왕래할 적에 일찍이 귀댁의 소재가 삼가(三嘉)와 김해에 있다는 것을 들었지만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하자 남명은 ‘평생 마음으로만 사귀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질 못했다’고 답했다. 또 퇴계가 1553년 ‘천리신교(千里神交)’를 맺자며 출사를 권유했으나, 남명은 ‘(퇴계를) 하늘의 북두성’처럼 사모하나 벼슬엔 관심이 없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1570년 퇴계가 타계하자, 남명은 ‘같은 해에 같은 도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 운명이로다’라며 애석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경남도와 경북도가 양 지자체 차원에서 남명과 퇴계의 학술교류를 추진하게 된 것은 남명과 퇴계가 추구해 왔던 학문적 이념이 오늘날에도 큰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남명은 실천궁행(實踐躬行)의 교육을 통해서 그의 제자들이 훗날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그 정신을 되살렸다. 퇴계는 학문적 논의와 진리탐구에 큰 업적을 낳았다. 궁극적으로는 두 거두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인문학적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일치된 것이다. 오늘날 물질적 풍요에 비해 인간의 정신수양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다양한 형태의 사회문제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해답을 이들 도학정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양 지자체의 바람이다. 경남도와 경북도가 도덕실행을 위해 남명학과 퇴계학의 교류를 확대하는 다양한 사업을 공동추진하기로 협약한 것도 이같은 의미다.

홍준표 경남지사는 “남명사상과 퇴계사상의 교류 촉진 사업을 통해 대한민국의 정신문화와 전통문화의 가치를 되찾고 경남·북 미래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관용 경북지사도 “퇴계-남명선생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학 사상을 재조명하고 이를 현대화하기 위한 학술적 토대와 네트워크 강화, 인력교류, 협력 프로젝트 개발을 통해 경남·북이 문화적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홍구기자 red29@gnnews.co.kr

 
남명 조식(왼쪽),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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