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의 그림이야기] 자의식과 욕망의 표현 자화상
[김준식의 그림이야기] 자의식과 욕망의 표현 자화상
  • 경남일보
  • 승인 2015.03.3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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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화가와 세상, 삶을 그린 붓질
화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방식은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도 발견될 만큼 오래된 인간 본연의 욕망이다. 하지만 고대의 절대적 권력 사회에서 화가 스스로 자신을 그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이것은 중세 기독교의 절대적 권위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화가 스스로 자신의 그림 속에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했던 욕망을 그 시절 그림에서 발견한다. 독립된 자화상은 아니지만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나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처럼 그림 한 켠에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해 놓음으로써 화가의 자기표현에 대한 욕망을 실현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Portrait of Giovanni Arnolfini and his Wife, 1434)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화가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는 드디어 화면 전체에 완전한 자신의 얼굴만을 그렸는데(1433), 서명이 존재하지 않아 자화상인가 하는 논란은 있지만 이것은 중세를 넘긴 근세 서양회화에서 거의 최초의 자화상으로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1500)

 

◇진리의 이미지를 추구한 뒤러의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지만 그는 안정적인 정신 상태의 소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자화상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과 혼란스러움이 묻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 현종 조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은 불과 가로 20.5㎝, 세로 38.5㎝의 작은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충격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고흐만큼은 아니라도 공재의 삶도 슬픔이 많았다. 공재가 그의 자화상에서 눈을 강조한 것은 슬픔의 표현일 것이라는 추측은 공재의 평탄치 못한 삶에 바탕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공재의 자화상에는 신체의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얼굴만 그려놓았는데 이는 현재의 관점에서도 매우 혁명적인 기법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공재보다 200년이나 앞서 지금의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난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1471~1528)의 자화상은 매우 위엄 있는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정면을 응시할 뿐만 아니라 그림 옆에 ‘AD’라는 사인을 남겨 얀 반 아이크의 그림과는 달리 스스로 그린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뒤러는 헝가리 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금세공 조수로 일하다가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개척자 미하일 볼게무트(Michael Wohlgemuth)에 사사(師事)하였는데 이 때 목판 인쇄 기술도 익혔다. 당시의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새로운 감각의 그림을 익혔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수채 풍경화는 독일회화에서 처음으로 발견되는 순수 풍경화로 평가 받는다.

뒤러의 자화상에는 매우 특별한 장치가 있는데 그것은 배경의 완전한 제거와 빛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즉, 자신의 모습을 완전한 어둠을 배경으로 하여 드러내 놓고 오른쪽 이마 위쪽에서 비추는 빛을 설정해 놓고 있다. 이러한 장치는 빛을 통한 자아 이미지의 신성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탈리아 여행 동안 ‘빛의 전도사’,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았음도 암시하고 있다.

신성을 암시하는 빛의 이미지를 화면의 위쪽에 배치한 뒤러는 자신을 매우 근엄한 표정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뒤러가 자신을 예수와 같은 ‘진리의 형상(Vera icon)’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16세기 초 서양 사회가 중세의 신성에 대한 절대적 권위로부터 해방되고 있음과 그러한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폴세잔의 자화상(1880)

 

◇우울함과 희망, 그 사이에 있는 세잔의 자화상

뒤러 이후 300년 지난 뒤, 프랑스의 화가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이 그린 자화상에서는 삶의 특정 지점에 서 있는 보통사람의 모습을 발견한다. 즉 세잔은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뒤러와는 달리 40대로 접어든 중년 남자인 자신의 고뇌와 이상이 혼재된 표정을 인상파화풍으로 묘사하고 있다.

머리 위에 쓴 흰 장식성 모자가 우스꽝스럽지만 옷차림은 성장(盛裝)이다. 표정이 굳어서인지 살짝 어두운 느낌도 없지 않다. 회색으로 잘 정리된 수염으로 보아 주인공의 사회적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을 거울에 비추고 그림을 그리다 보니 눈동자와 얼굴의 방향이 약간 이상하지만 채도가 높은 색을 사용하여 애써 밝은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린 폴 세잔은 부유한 은행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엄격한 부친의 강요로 법학 공부를 하기 위해 법과대학에 진학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화가로서의 삶을 개척한다. 이런 일 때문에 부친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줄어들자 평생을 강박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두터운 색조가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그림에서는 희미한 희망의 빛도 늘 발견 할 수 있다.

세잔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화가로서의 성공이었는데 그는 몇 번이고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낙향했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작가 에밀 졸라와 함께 그는 정치적으로 활발히 활동했으며, 자신을 혁명론자로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이 파리 최상층 귀족들이 주요 고객이 되는 파리 살롱 전을 통과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늘 거절이었다.

하지만 세잔은 포기하지 않고 이러한 거절을 바탕 삼아 1863년 ‘낙선전’이라는 대안을 마련하고 또 다른 불합격자인 마네(Edouard Manet), 피사로(Camille Pissaro), 라투르(Henri Jean Theodore Fantin Latour) 등과 함께 작품을 전시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인지 파리 살롱 전은 그 뒤 20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이들의 그림을 통과시킨다.

신문 기자이자 미술비평가였던 루이 르루아(Louis Leroy)가 미술비평잡지 르 샤리바리(Le Charivari : 소란스럽다는 뜻)에 기고한 글에서 모네의 작품 “해 뜨는 인상”(1872,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소장)을 폄훼하는 의미로 인상파라 불렀지만 그 뒤 이 말은 모네를 따르는 미술유파를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세잔은 고흐, 고갱과 함께 이 인상파의 중심에 서 있는 화가로서 그의 자화상에서 그가 가진 삶의 슬픔과 희망을 인상파적인 외광(plein air)을 이용하여 두텁고 거친 마티에르(matiere)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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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식 2015-11-07 21:00:09
유승욱 님께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카라바지오 이야기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gnnews 2015-05-11 16:50:35
경남일보 입니다. 지적해주신 부분에 대한 오류를 확인하였습니다. 외부 필진의 글이어서 원본은 두고 댓글로 지적하신 오류부분 정정합니다.
뒤러(1471~1528)와 카라바지오(1572~1610) 생몰연대를 살펴볼 때 뒤러가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았다는 부분은 오류로 확인됩니다.

유승욱 2015-05-10 08:39:45
카라바지오는 뒤러의 이후 사람입니다. 즉 "이러한 장치는 빛을 통한 자아 이미지의 신성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탈리아 여행 동안 ‘빛의 전도사’,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았음도 암시하고 있다." 오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