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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38)<99>경남지역의 문인 등단50주년 기록자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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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5:4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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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정한(1908-1996)은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산리에서 김기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36년 28세때 단편 ‘사하촌’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 등단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1996년에 작고했으므로 등단 60년을 기록한 셈이다. 그러나 김정한은 1940년 ‘월광한’을 발표한 이후 절필하게 되는데 그 공백이 25~26년이나 된다. 반세기를 등단을 하고는 배경 속으로 들어가 있었던 셈이다. 이런 분들의 경우도 등단 햇수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적용하거나 말거나 하는 것이 무슨 자격사항이 아니므로 문제될 것은 없다. 그렇더라도 그 사정을 살펴보는 것이 작가론 연구에 있어서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김정한의 연보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자. 그는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28년에 동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양산 대현공립보통학교 교사를 지냈다. 1930년 일본 와세다대학 제일고등학원 문과에 입학, 유학생 잡지 ‘학지광’을 편집했다.귀국후 양산 농민봉기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33년 남해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농민문학에 투신하였다.

1936년 단편 ‘사하촌’이 조선일보에 당선되어 집필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후 ‘옥심이’, ‘항진기’, ‘기로’ 등을 발표했다.1940년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인수하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피검되었다.일제탄압으로 1941년 이후 절필했다. 이후 이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1947년 부산중학교 교사, 1950년 부산대학교 교수, 1961년 5.16직후 교원노조건으로 부산대 교수 퇴임당함, 이로부터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으로 논설, 칼럼 집필하면서 언론인이 되었다. 1965년 부산대학교 전임강사로 강등 복귀함, 이듬해 1966년 ‘모래톱 이야기’로 문단에 복귀했다.

이까지의 자료를 놓고 그가 절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짐작해 보기는 어렵지 않다. 첫째로 일제 말기의 탄압상황이라는 점, 광복 이후 작가의 진로가 하나의 비전이나 정체성을 붙들기가 어려웠다는 점, 이 두 가지로 집약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혼란을 극했던 광복 전후기가 그 25년에 해당되기 때문에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서 그 혼란기가 극심한 방해요인으로 작용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노동운동이나 노조에 관여한 사람으로서 다시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일한 것이 주목이 된다. 신문의 사설이나 칼럼이라는 것이 그의 실천운동의 또다른 방편일 수 있으므로 그렇지 않은 사람이 신문에 집필자로 참여하는 것과는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런데다 그가 소설가의 문장으로 단련되었던 초기의 문체가 실천운동이나 사설류 문체로 진입하면서부터 한없이 투박하고 매마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럴 때 때때로 소설을 붙들려고 한다면 어떠했을까, 문장이 소설의 리듬으로 곧장 흘러나갈 수 있었을까, 당연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유추해 보면 그가 40년대에 절필했던 소설을 다시 쓴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스스로가 간파했을 것 같다. 그러다가 그는 교수로 복귀했고, 실천의 운동과 사설류 문체를 청산하는 계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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