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재 여행] 남해 대국산성
[경남 문화재 여행] 남해 대국산성
  • 박철홍
  • 승인 2015.04.26 16: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국시대 건립 추정… 왜란때 방어기지로 활용
 
대국산성에서 내려다 본 남해안.


남해대교를 지나 노량삼거리에서 덕신마을 쪽으로 난 길을 따라 20여분 차로 가면 대국산성(大局山城)이라는 입간판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경사진 산길을 따라 2㎞ 올라가면 돌로 쌓은 성(城)이 눈에 들어 온다. 경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돼 있는 대국산성이다. 산성 앞 400m까지 차로 올라갈 수도 있다.

이곳은 관광객뿐만 아니라 남해군민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성 안에서 출토된 토기조각, 기와, 자기 조각 등을 분석한 결과 삼국시대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은 북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

대국산성은 남해 설천면 진목리와 비란리, 고현면 남치리에 걸쳐 있는 대국산(해발 375m) 정상에 돌로 쌓은 성이다.

성 둘레를 걸으면 남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햇살에 비친 쪽빛 바다와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초록빛깔 임야가 한데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성 안에는 돌로 쌓은 네모진 경계 초소가 있는데 조선시대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평상시에는 성 아래 마을에 거주하다 왜구의 침입을 받으면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고 공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국산성은 타원형 성곽으로 둘레 1.5㎞, 성벽 높이 5~6m, 윗부분 폭 2.4m이다. 성벽은 화강암을 겹겹이 쌓아 올리고 내부에는 흙과 자갈을 채워넣었다. 성 둘레를 걸으며 “이 많은 돌을 어디서 구했으며 어떻게 이 높은 곳까지 운반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조선 경종(1721~1724)때 천씨 성을 가진 뛰어난 장수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하루는 천 장군이 일곱 시녀에게 “너희들이 저녁밥을 짓는 일과 내가 성을 쌓는데 누가 빨리 끝내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다.

7명의 시녀가 팔을 걷고 밥을 짓는 동안 천 장군은 부채 하나를 들고 산허리에 올라가 바다를 향해 천천히 부채질을 시작했다. 시녀들은 ‘저 사람이 내기에는 이길 생각이 없나 보지’라며 내기에 이겼다고 좋아할 때 바다속에 있던 커다란 바위들이 소나기처럼 산꼭대기에 떨어져 저절로 성이 쌓아졌다고 한다. 황당한 얘기지만 대국산성 돌에는 바다 속에서 날아온 돌을 증명이라도 하듯 굴껍질, 조개껍질이 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천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국산성내 건물이 있었던 터.
계단식 축조방식의 연못.


이 성의 축조와 관련해 또 다른 전설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약 500년 전 대국산 아래 비란마을에는 사이좋은 형제가 살았다. 둘다 청년이 된 형제는 마을에 사는 한 처녀를 같이 사랑하게 됐다. 그 처녀는 미모가 뛰어나 모든 총각들의 눈길을 끌었고, 이 형제도 각각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는 형제 중 누구를 택해야 할 지 고민했다. 이를 눈치챈 형제는 이때부터 사이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형이 아우에게 “청아, 우리가 이렇게 귀한 세월만 보내며 안타까워 할 것이 아니라 어떤방법을 생각해야 되지 않겠나”며 “너와 나는 지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난 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다.

형은 “그녀가 한 벌의 두루마기를 만드는 동안 나는 100㎏이 넘는 쇠고랑을 차고 16㎞ 떨어진 읍내까지 같다오고, 너는 대국산에 돌로 성을 쌓은 거야”면서 “이긴 사람이 그녀가 만든 두루마기를 입고 그녀와 살기로 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만일 그녀가 우리보다 두루마기 작업을 먼저 끝내면 우리는 그녀와의 혼인을 포기하고 마을을 떠나자”고 했다.

동생 청이도 이 같은 형의 제안에 수긍하고 그해 가을 보름날 밤 처녀는 두루마기를 만들고 형제는 약속대로 내기를 시작했다. 밤이 깊어 달이 서산에 걸릴 무렵 동생 청이는 성을 다 쌓았다. 그때까지 형은 돌아오지 못했고 처녀는 두루마기를 다 만들지 못했다. 내기에 패한 형은 약속대로 칼로 자기 가슴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청이는 막상 내기에서는 승리했으나 형이 죽고 나니 왠지모를 서러움에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후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청이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자기가 쌓은 성을 이용해 마을을 지켜냈다고 한다.

대국산성 한 가운데에는 건물을 지었던 터가 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로 주거공간으로 활용됐다. 기와 문양이 어골문(魚骨文)이었던 점과 많은 수량의 고려도기가 출토돼 고려시대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 터 앞에는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연못이 있다. 입수구와 출수구는 설치돼 있지 않다. 발굴조사 결과 7세기 축조된 대국산성 성벽과 동일한 축조법을 사용했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연못은 거제 폐왕성, 광양 마로산성, 아차산성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박철홍기자 bigpen@gnnews.co.kr



 
대국산성 둘레 1.5km에 겹겹이 쌓여 있는 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