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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41)<102>경남지역의 문인 등단50주년 기록자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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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5: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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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출신 김상옥(1920-2004) 시조시인은 1939년 ‘문장’지에 가람 이병기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2004년에 돌아갔으니까 등단 65년을 기록한 셈이다. 김상옥은 올된 시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동시 <꿈>을 교지에 실었고 가정이 어려워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온갖 일들을 하며 생애를 보냈다.

초등 졸업후 남강인쇄소 인쇄공이 되었고 재학중에는 월사금을 못낼 때 산에 가서 울면서 <삐삐>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문청시절 1930-1935년간에 경남 최초 시조동인지 ‘참새’(프린트판)의 도움을 받았는데 10대 전반기이기 때문에 조숙했다는 말은 여기서 알 수가 있다. 1936년 17세때 조연현과 함께 동인지 ‘아(芽)’를 내고 <무궁화>를 발표했는데 이로 하여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고 두만강 근처 함경북도 웅기로 유랑을 떠났다.

1938년 19세에 함경북도 청진의 서점에서 잔일을 봐 주면서 김용호, 함윤수 등과 ‘맥(貊)’동인으로 활동했고 그 뒤에 임화, 서정주, 박남수, 윤곤강 등이 그 맥동인회에 합류하기도 했다.1939년 ‘문장’지에 이병기의 추천으로 <봉선화>가 실렸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시조공모에 <낙엽>이 당선되었다.

1940년 통영으로 귀향하여 남원서점을 경영하였고 이 서점에 걸린 이후의 우국시가 문제되어 통영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삼천포로 피신하였다. 1945년 2월 일본 헌병대의 검거 소식을 사전에 알게 되어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 윤이상과 함께 서울에서 숨어 지냈다.

해방이 되자 김춘수 등은 통영에서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연극운동 등 예술운동에 들어갔다. 11월에 삼천포문화동지회를 창립하여 한글운동, 교가 보급운동을 이끌었다. 1946년부터 20여년 동안 부산, 마산, 삼천포 등지에서 교사로 일했다. 그러는 사이 첫시조집 ‘초적(草笛)’(수향서헌)의 편집, 조판, 인쇄를 직접 관장하는 우리나라 초유의 역사를 만들어 화제가 되었다. 윤이상은 그의 시 <추천>, <봉선화>에 곡을 붙여주었다.

그는 문교부 편수국 심의위원을 지냈고 1953년 출간한 시집 ‘의상’ 기념회에서 이중섭은 닭그림으로 축하를 해주었다.1954년 충무공 이순신 시비건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1963년 서울로 이주하여 골동품 가게 아자방을 경영하였다. 1972년에는 일본 도꾜에서 서화 작품전을 열었고 2천년대까지 여러 차례 개인전(서예와 그림)을 열어 주목을 받았다. 그는 진주에서도 서화전을 열었는데 1978년경으로 기억된다. 필자는 김상옥 선생의 특별한 관심권 안에 있었으므로 진주방문 때는 반드시 연락을 받고 만나뵐 수 있었다. 전시회 때 찾아가서 작품 한 편을 샀더니 “너무 너무 고맙다. 월급쟁이가 선뜻 그 일부를 잘라 그림을 산다는 것은 절대 예사로운 일은 아니야.”

그 이후 선생은 진주에 올 때마다 필자에게 추사체 글씨 한 폭씩 써 주었다. <수류화개(水流花開)>, <백세청풍(百世淸風)>이 그것이었다. 서재에 늘 걸어두었는데 이사하면서 어디로 갔는지 한 폭도 보관된 것이 없다. 사랑을 받고도 그에 걸맞는 기념 흔적이 없어 때론 허전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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