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
[경일시론]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
  • 경남일보
  • 승인 2015.05.18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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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 (객원논설위원·경상대학교 교수)
고려인들은 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을까. 해전에 약한 몽골군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신하자 길길이 날뛰며 국토의 남쪽 끝 경상도와 전라도까지 치고 내려와 방화, 약탈, 살육 등을 자행하였다. 무자비한 무력 앞에 고려인들은 어찌 해볼 엄두조차 못 내고 망연자실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기댄 것이 부처님의 원력이었을 것이다. 무모하고 흉측스러운 몽골군이 제발 물러가 주기를 기원하며 16년 간이나 나무를 잘라 깎고 다듬어 경판을 만들고, 한자 한자 땀을 뜨듯 8만4000 법문을 새겼다.

적군이 온 나라를 짓밟고 백성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힘 없는 나라의 공권력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부처님의 가호나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후손으로서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이다. 1231년부터 29년 간 6차례에 걸친 몽골 침략이 끝났을 때는 10대 소년 소녀들이 마흔이 넘어 있었다. 제대로 먹기를 했을까, 시집·장가는 온전히 갔겠는가. 제 인생을 깡그리 망쳐버린 그 불쌍한 세대는 역사의 어디에서 누구에게 보상을 받을 것인가.

조선시대에는 더욱 굴욕적이고 참혹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틀어박혀 버티던 인조는 마침내 청 태종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임진왜란 7년은 유성룡이 징비록에 남겼듯이 국난이 닥치면 임금은 피신하고, 적에게 노출된 백성들만 짐승만도 못한 처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이 땅의 주인들은 그 많은 국난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지 못하고 훗날 일본에 또다시 혹독한 수난을 당했다.

천혜의 기후와 자연조건을 갖춘 아름다운 금수강산 한반도는 지정학적인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고난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동쪽으로는 호시탐탐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일본, 서쪽과 북쪽은 넘을 수 없는 장벽 중국과 러시아가 버티고 있다. 동북아 수많은 민족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거나 중화(中華)에 녹아 버렸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고조선은 한사군을 몰아내고 우리 한(韓)민족을 보존했고, 삼국시대 땐 당나라 손아귀에 들어갈 뻔한 나라의 명맥을 이어 왔다. 고려, 조선, 근대를 지나며 우리는 끊길 듯 이어지고 짓밟혀 뭉그러질 듯하다 다시 살아나는 끈질긴 역사를 갖고 있다. 처녀를 바치고, 말을 바치고, 곡식과 옷감을 바치는 수난을 당하면서도 우리는 제 말과 글을 쓰는 민족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유구하고 찬란한 5천년 역사’는 유구하나 결코 찬란하지는 않았다. 그 역사의 90%는 가난과 굶주림, 침탈과 수난의 역사였다. 우리가 쌀밥을 숟가락 가득 입에 넣고, 추위를 막을 따뜻한 옷을 입고, 환하게 불을 밝힌 방 안에서 온 가족이 행복한 웃음을 꽃피우게 된 것은 불과 40~50년 안짝이다. 비록 허리가 잘린 채로나마 우리는 역사상 최단기간에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이것은 산업화시대 우리 아버지 세대가 피와 땀으로 일궈 놓은 눈물의 산물이다.

아, 그런데 우리는 너무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악마의 마법에라도 걸리지 않은 다음에야 우리가 그 아프고 굴욕적인 과거를 깡그리 망각한 채 이다지도 방종하고, 오만하며, 분열하고, 갈등하는 망국적인 모습을 보일 수가 있을까. 이 땅을 둘러싼 환경은 수백 년, 수천 년 전과 티끌만치도 달라진 것이 없다. 국제적인 위기와 긴장은 여전한데 우리들만 풀어져 또 다른 호란과 왜란을 불러들일 틈새를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두렵고 안타깝다.

 
김진석 (객원논설위원·경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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