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위식의 발길닿는대로 (67) 용암사지
윤위식의 발길닿는대로 (67) 용암사지
  • 경남일보
  • 승인 2015.05.1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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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사라진 절터…고요한 흔적만 남겨져
용암사지 전경



2번 국도를 따라 진주에서 마산방향으로 20km 정도를 가다가 이반성면 용암리로 접어들면 영봉산 야트막한 중턱에 보물 제372호인 승탑과 경남도유형문화재 제4호인 지장보살석좌불이 있는 용암사지가 절골마을 작은 골짜기의 끄트머리에서 세속을 멀리하고 없는 듯이 돌아앉은 비경이 있다.

송죽이 우거진 비탈길을 잠시 올라 텃밭 옆에 차를 세우고 ‘비연문’이라는 현판이 붙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옛 세월에 멈춰버린 태고의 신비가 찾는 이를 홀린다.

선경의 한 자락을 예비하려고 하늘이 일렁이고 땅이 요동치며 뇌성벽력이 천상의 불길을 휘두르는 귀청 떨어지는 소리에 ‘쩌-억!’ 하고 산이 갈라지며 흑룡이 승천한 비경임이 분명하다. 꽤나 널따란 평평한 반석의 틈새를 벌려놓은 협곡은 좌우로 10여m는 족히 넘을 수직의 절벽이 마주보고 섰다.

절벽의 벽면은 시루떡을 켜켜이 쌓은 듯이 검정색의 퇴적암이 층층으로 쌓여서 이끼와 담쟁이덩굴로 급한 곳을 가리고 억겁의 세월이 멈춰버린 정적 속에서 묻힌 채로 옛 내음을 풍긴다.

왼편 절벽 아래로 절집 같으면 요사채가 앉을 자리에 시골의 여염집 같은 낡은 건물 두 채가 ‘ㄱ’자 형으로 추녀를 맞대었고, 뒤로는 가슴높이의 축대가 층을 이루었다. 자연석의 돌계단을 오르면 고색창연한 목조기와 건물이 정면을 길게 가로막고 섰는데 세월에 빛이 바랜 기와는 희끗희끗하고 용마루는 허리가 길게 늘어졌다.

널따란 대청마루와 주련으로 오지랖을 가린 나무기둥은 윤기라고는 없이 결결이 골이 패여 거칠고 가칠하다.

방풍방우를 위해 근래에 와서 유리문으로 앞가림을 하였건만 속세와 절연하고 인적 없이 외진 골은 괴괴하고 적적하여 걸음을 멈췄더니 도승에 홀렸는지 용암사의 대웅전이 옛 그림이 되어서 어른어른 막아선다.

청아한 목탁소리는 산골짜기를 울리고 숙연한 염불소리는 가슴을 울리는데 죽비 소리에 놀라 자세를 고치니 대웅전은 간곳없고 ‘장덕재’ 라는 편액이 붙은 해주정씨의 제각이 마주섰다.

범종이 울어서 새벽을 열고 법고가 울어서 축생을 깨우던 종각이 있을 법한 절벽아래엔 ‘농포집장판각’ 이라는 현판을 달고 맞배지붕의 작은 전각이 앉았는데 충의공 농포 정문부선생의 문집판각은 아랫마을 ‘충의사’로 옮겨지고 안은 비워져 있다.

 
용암사지 석좌불
‘장덕재’ 옆으로 돌아가면 평평한 바닥에 거무스름한 돌거북이 둥글넓적한 석비를 등에 업고 납작하게 엎드렸다. 두 마리의 용이 서로의 발톱을 움켜지고 뒤엉켜서 용틀임을 하였는데 전면에는 ‘대천태종홍자국통비’ 라 쓰였고 뒷면은 ‘용암’이라고 쓰였는데 음각의 전서체가 세월에 마모되어 판독이 쉽지 않다.

무슨 업보가 그리도 많아선지 천년도 마다않고 주야장천 빗돌을 등에 업고 납작하게 엎쳤는데 세월이 버거워서 늘인 목이 부러진 채 돌덩이로 턱을 고여 가까스로 붙였건만 측은하고 애처롭다. ‘홍자’가 뉘신지 알 수가 없으니 사학자의 몫으로 돌리지만 거북이 깔고 앉은 기단석도 본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폭 1m의 너비에 길이 2.2m이고 두께는 20cm정도인데 네 귀를 정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오려내어 양 끝이 凸자 모양인 것으로 보아 다른 짝은 凹자 모양으로 추정되며 암수의 아귀를 맞붙이면 석관 모양인 어떤 석조물의 부재임이 틀림이 없으나 그 원형과 용도는 짐작조차 안 된다.

돌거북 옆으로는 꽤나 널따란 빈터가 남아 있고 뒤쪽으로는 나직한 석축으로 높이가 다른 평지가 약간의 경사면을 이루는데 보물 제372호인 승탑과 석등이 노거수인 은행나무 밑에 나란하고 지장보살을 모신 작은 전각은 비탈위에 섰는데 퇴적암 석편들로 담장을 쌓았건만 속세와 맺은 연을 끊어볼까 말아볼까 무릎높이로 나직하다. 키 높이보다 훨씬 높은 승탑은 하대석의 팔면에는 안상무늬를 깊게 파고 그 안으로 연화좌대를 깔고 결가부좌로 앉은 작은 천부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법의의 주름과 표정까지도 선명하여 구름을 타고 두둥실 떠있는 것만 같다. 받침이 두툼한 팔각의 옥개석은 구름무늬의 귀꽃을 조각하여 아름답게 장식했고 줄기를 팔면으로 연결하여 화려하게 다듬었다. 옆에 있는 석등은 기단석에 무늬를 새겼고 크기가 비슷한 연화좌대 두개를 포개어 간주석도 없이 화사석을 얹고 옥개석을 덮었는데 상륜부의 보주도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이 어색하지만 조각품 자체의 아름다움이 참으로 멋스럽다.

 
용암사지 승탑
비탈 위쪽에 선 옹색하기 그지없는 단칸짜리 전각의 널판지문을 열면 큼지막한 화강암의 석좌불이 가슴높이에 엄지손가락을 감싸 쥐고 연화좌대도 없이 돌바닥에 앉았는데 인적이 반가워서 근엄함도 버리시고 미소로만 반기신다.

도선국사가 지리산 성모천왕의 서몽으로 창건한 세 암사(巖寺) 중의 하나인 영험한 도량이 어쩌다가 폐사지로 남았는지 세월도 속절없고 신심도 속절없다. 전각이 비좁아서 안으로는 들지 못하고 문밖에서 예를 가름하고 돌아서니 협곡 속은 인적 없어 더 없이 고요한데 뻐꾹새 울음소리가 오월의 용암사지를 외로움에 섧게 한다.

절벽위의 동산을 오르려고 높이가 낮은 돌거북 앞 쪽을 아무리 살펴봐도 사람이 오르내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키를 넘는 설대만 무성히도 우거졌다. 막무가내로 제일 야트막한 수직의 언덕을 설대를 휘어잡고 올랐더니 다시 꼭대기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왔다. 일그러진 돌계단을 오르자 제법 평평한 정수리에는 설대가 더욱 무성하고 여남은 그루의 낙락장송이 하늘을 덮었는데 발부리에 닿는 촉감이 이상하여 발끝으로 낙엽이 쌓인 바닥을 헤집어 보았더니 석탑의 부재가 바닥에 널렸다. 네모난 석재들이 받힘을 삼단으로 조각한 것으로 보아 석탑의 갑석이다. 또 다른 석재는 양 모서리에 우주가 조각되어 있어 탑신이 분명하고 높이나 폭의 너비로 보아 꽤나 큼직한 석탑으로 짐작되는데 선과 면의 다듬질이 빚은 듯이 곱건만 옛 모습 어디 두고 어쩌다가 무너져서 이지경이 되었을까! 절벽 아래의 마당 한 귀퉁이에 있는 화강암 부재도 여기서 굴러 떨어진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네모난 석재에 동그랗게 확이 파여 돌절구 대용으로 요긴하게 쓰시던 할머니는 마을의 본가로 살림집을 옮겨가서 관리사는 비워있다. 태초의 비경이요 지장보살 법계인 청정한 도량인데 언제쯤이면 연등 하나 내걸리고 향불이 피어날까! 나무지장보살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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