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황혼의 이야기 간직한 바위산
“국가존망은 천명인데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굳게 지키다 힘이 다한 후에야 그만둘지언정 어찌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넘기는 것이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재위 927∼935)이 고려 태조에게 백기 투항한 것을 못 마땅히 여긴 태자는 통곡하고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신라 땅을 떠났다.
망국의 한을 달래며 태자와 동행한 덕주공주는 금강산으로 가던 중 문경 어디쯤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그날 밤 남매는 범상치 않은 꿈을 동시에 꾸었다.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곳에 절을 지으면 억조창생 자비를 베풀수 있다’고 말한 뒤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에 덕주공주는 월악산 기슭에 마애여래석불을 세웠고 태자는 하늘재 넘어 미륵석불을 세웠다.
지금까지도 이 마애여래석불은 월악산 해발 540m지점에 남쪽을 향해 서서, 북쪽의 미륵석불과 마주하고 있다.
훗날 문경을 떠난 태자는 개골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 초막을 짓고 삼베옷에 풀을 뜯어 먹으며 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람들은 그를 마의태자라 불렀다. 월악산은 공주의 산이요, 하늘재 넘어 미륵석불은 태자의 골이다.
명산 플러스는 덕주와 마의 남매가 망국의 한을 억만창생 자비의 베품으로 승화시킨 사연을 간직한 월악산을 찾아간다.
월악산은 국립공원으로 높이 1097m이다. 충북 제천 단양 충주, 경북 문경과 경계를 이루며 충주호가 인접해 있다.
▲등산로.
덕주골입구→덕주사→마애불→마애봉 960고지→송계삼거리→신륵사 삼거리→월악 영봉(반환)→송계삼거리→ 동창교(월악산휴게소)→597번도로 이용 덕주골 입구 원점회귀. 12.5km 휴식 포함 6시간 소요.
오전 9시 35분, 덕주골 입구 마을에는 휴양객을 위한 펜션이 많다. 덕주탐방지원센터를 통과하고 수경대를 거쳐 덕주산성으로 들어간다. 이 코스는 오름길만 3시간 20분이 소요되는 곳으로 만만치가 않다.
수경대는 덕주골에서 첫 번째 만나는 경승. 노송이 어우러진 자연암반 위에 사시사철 청정수가 흐른다. 신라 때부터 월악신사를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반석 옆에 수경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덕주산성은 월악산의 남쪽 마애불주변에 있는 상덕주사를 중심으로 외곽을 여러 겹 둘러 쌓은 석축산성이다.
고려 고종 때 항몽지였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을 막아낸 요충지였으며 조선말에는 명성황후와 관련이 있는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벽입구의 왼쪽 물길 건너 덕주루, 오른쪽에는 석성, 그 사이로 들어가면 산으로 향하는 진입로가 열린다.
20분 만에 덕주사에 닿는다. 신라 진평왕 9년 서기 586년에 창건된 덕주사에는 남한 유일의 범자비 ‘대불정주범자비’가 보존돼 있다. 유형문화재 231호. 높이 161cm인 이 비석은 1988년 2월 월광사지 입구 논두렁에서 발견됐다. 비문에 한자 ‘대불정주’ 음각과 105자 인도 산스크리트어가 새겨져 있다. 불교수행이 지향하는 것, 그 실천과정과 수행자들의 위상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덕주사 앞에는 볼라드 크기의 남근석 세개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월악산 영봉’ 이정석 옆 작은 교량을 건너면 산으로 가는 숲속 길이 열린다.
한시간 만에 상덕주사 부근 마애여래석불에 도착한다. 월악산 히어로 여래석불은 급경사 언덕배기 거대한 수직암반 벽면에 새겨져 있다. 얼굴은 돋을새김하고 몸통은 선각으로 처리했다. 조형성은 떨어지나 서글서글한 이목구비는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덕주 자신의 모습을 새긴 것이라는 설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달래며 덕주사를 짓고 아버지 경순왕을 그리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머리 부분 좌우에 난 4개의 구멍은 과거 목조전실을 만들기 위해 파낸 것이다.
마애여래석불을 떠나면 본격적인 오름길. 이때부터 등산객을 질리게 하는 돌계단, 철 계단과 맞닥뜨린다. 모롱이를 돌때마다 화강암이 불쑥불쑥 솟았으며 바위틈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사이 사이를 비켜 용케도 계단을 설치했다.
고도는 높아지고 산세는 더욱 험해지나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소나무의 풍경이 등산객의 탄성을 끌어 낸다.
이 계단을 올라 5분여 더 진행하면 사방이 트이는 전망대. 드디어 멀리 월악 영봉이 보름달처럼 둥실 떠오른다.
안개 낀 날씨 탓에 전망이 선명치 않지만 멀리서도 거대하고 웅장한 바위벽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전망대 지나 960m 마애봉, 이때부터는 다시 내림 길, 헬기장과 송계갈림길까지는 천상화원이다. 단풍취 앵초 등 산야초와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 오감을 자극한다. 천연기념물 217호 특산종 산양의 배설물까지 보인다.
영봉공원지킴터 시설물이 있는 송계갈림길에서 왼쪽은 동창교 하산길이며 영봉은 직진해야 한다.
월악영봉은 다가갈수록 점점 더 자신의 웅장한 용모를 드러낸다. 설악산 북한산 인수봉 등을 제외하고는 단일바위로는 국내 최대의 크기다. 험준하고 가파르며 높이 150m 둘레 4km나 되는 거대한 암반이다. 형태와 규모는 달라도 흡사 알프스 산맥 마테호른 거벽처럼 보인다.
체르마트마을 현지인들이 마테호른을 영봉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월악 영봉도 그런 포스와 영험함을 지니고 있다.
등산로는 산허리를 돌아 뒤편 신륵사 갈림길부근에서 오르게 돼 있다. 워낙 드센 수직절벽이라 정면에서 직접 오를 수는 없다.
현재 기존 등산로계단을 철거하고 신설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정상에 오르는 마지막코스에도 숨이 멎을 만큼 수직에 가까운 계단이 설치돼 있다. 암벽에다 계단을 붙여 세웠다.
낮 12시 50분, 3시간 15분 만에 정상에 선다. 드센 암반과는 달리 월악산은 여성의 산으로 불린다. 실제 덕주사 뒷편 수산리에서 보면 산의 형세가 누워 있는 여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음을 의미하는 한자 달월(月)이 들어 있다. 조상들은 음기가 강한 산으로 여겨 지기를 누그러뜨려 음양의 조화를 위해 덕주사 입구에 남근석 3기를 세웠다.
월악산 주봉은 신령스러운 봉우리라 하여 영봉 또는 나라의 큰 스님이 나온 곳 혹은 나올 곳 이라 하여 국사봉이라 부른다.
아주 오랜 옛날 영봉 위로 달이 떠오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월형산이라 불렸고 고려 초기에는 와락산으로 불렸다.
와락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도읍을 정할 때 개성의 송악산과 중원의 월형산이 경쟁하다 탈락하자 도읍의 꿈이 와락 무너졌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휴식 후 오후 1시 30분, 미끄러지듯 와락산을 내려왔다. 송계삼거리까지 되돌아온 뒤 오른쪽 동창교 방향으로 하산 길을 잡았다. 이 코스는 전망이 별로 없고 돌계단이 많아 주로 하산 길로 잡는 곳이다.
산을 다 내려왔을 때 월악산산신당이 눈에 들어온다. 월악산이 영봉으로 불렸던 내력을 간직한 사당이다. 원래 상 중 하당 세 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하당만 남아 있다.
취재팀은 동창교 부근 월악산휴게소로 내려와 597번 도로를 걸어 오후 3시 30분 덕주골 입구에 원점 회귀했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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