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팔만대장경은 과연 몇장일까?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과연 몇장일까?
  • 김상홍
  • 승인 2015.06.0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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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아대 조사 의뢰…결과 여부 관심 고조
문화재청이 해인사의 장경각과 인접해 있는 사간판에 보관돼 있는 경판 가운데 팔만대장경판과 관련이 있는 경판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최근 부산 동아대학교에 조사를 의뢰함에 따라 팔만대장경의 수량에 대한 관심도가 증폭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때 계속되는 외침으로 피폐해져 가는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국가사업으로 시작됐다.

부처의 말씀을 기록으로 만들면서 흉흉한 민심을 달래고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뭉칠 수 있는 정신적 모멘트를 만드는 효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세종때 사신을 보내 대장경판을 달라며 억지를 부렸다. 처음에는 조정에서 ‘소용이 덜한 물건’이라는 이유로 내주려 했다가 ‘다음에 다른것을 더 요구하면 그때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반대에 부딪쳐 거절했다.

고려때의 숭불정책과는 달리 조선이 개국하면서 숭유억불책을 펴자 정책변동기에 불교문화재를 소홀히 할 수 있고 일본은 그리도 갖고 싶었던 불교경판을 구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발빠른 외교를 시도한 셈이다.

문화재청이 공인하고 있는 팔만대장경의 수량은 8만1258판이다.

이 수치는 놀랍게도 일제때인 1915년 일본인 오다 간지로(小田幹次郞)가 조사한 수치다.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지 664여년만에 일본인에 의해 처음으로 공식 조사된 기록으로 정부도 1962년 팔만대장경을 국보 제32호로 지정하면서 별도의 수량 확인작업 없이 이 수치를 공식화 했다.

그 뒤 경북대학교 서수생 교수(작고)가 ‘팔만대장경연구, 이중판과 보유판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8만1240판으로, 일제때보다 18판이 적은 것으로 발표했으나 공인되지는 못했다.

국내 학자의 연구논문으로는 최초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일반인의 관심을 갖지 못했고 조사자료도 지금은 경북대 도서관 창고에 보관돼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 교수의 제자는 “팔만대장경 연구에 평생을 바친 선생님의 방대한 자료가 사장돼 있어 안타깝다”며 “대장경 연구의 획기적 기초자료로 손색이 없기 때문에 체계적인 분류와 연구에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해인사 스님들은 하나같이 “경판의 갯수가 뭐그리 중요해요. 경판에 담긴 부처님의 말씀이 중요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나라의 융성과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려는 선인들의 원력이 중요한거지요”라고 한다. 선문답 처럼 물체에 끄달리지 말고 의미를 되새기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의 말씀을 남기려는 조상들의 노력이나 원력도 중요하지만 속인으로서야 수량 또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도 “그동안 정부나 학계에서는 팔만대장경을 한글화 하고, 경판의 재질과 보존방법 등에는 연구를 많이 했지만 정작 수량에 대해서는 관심이 낮았던 것 같다. 그만큼 수량 자체에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는 얘기다”며 “이제부터라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수량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 2000년부터 2011년까지 11년동안 ‘해인사고려대장경 디지털 영상화 및 기초자료 데이터베이스사업’을 실시했다. 일제시대 이후 우리손으로는 처음으로 과학적 기법을 도입한 기초조사작업이다.

이 작업은 대장경판의 너비와 두께, 길이 등을 100분의 1㎜ 오차범위로 측정하고 무게를 달아 기록화 하는 작업이다. 3∼5㎏의 목판 하나하나를 들어내서 촬영하고 판가와 경전의 종류, 이름, 경전의 권 수 등을 분류표도 만들었다. 촬영한 필름은 컴퓨터에 등록하기 때문에 글자 한 자, 한 획만 달라도 중복여부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업에서 경판의 숫자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지금까지 공인기록인 8만1258판 이외에 110판이 새로 발견된 것이다. 잦은 인경작업으로 목판이 마모되면 그 경판만 새로 만든 뒤 마모판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전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해서 ‘보유판’이라고 하는 이 경판은 지금 문화재위원회 개최를 기다리고 있다. 이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팔만대장경 경판으로 인정받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합천군 관계자는 “팔만대장경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인류의 문자문명을 발전시킨 계기였다”며 “자랑스런 팔만대장경을 보존할 수 있도록 국민들의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상홍기자
사진설명
국보 52호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장경판전 건물 일곽은 길쭉한 마당과 그 둘레의 배치된 여러 건물들로 구성돼 있다.
마당에서 볼때 바깥쪽에 해당하는 앞 건물은 하전 수다라장이 있고 뒤에 있는 안쪽 건물이 상전인 법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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