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에서 김연아까지…세계 속 스포츠 강국
손기정에서 김연아까지…세계 속 스포츠 강국
  • 연합뉴스
  • 승인 2015.06.17 17:3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복 70년, 폐허에서 기적을 이룬 한국 체육사



 
일본 강점기에 스포츠 또는 운동이라는 것은 실제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머릿속에 잠시나마 담아두기도 벅찬 일이었다. 이 당시 한국 스포츠의 상징은 마라톤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기적을 일궈냈다. 사진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1등으로 골인하는 장면.


스포츠는 사치였다. 나라 잃은 설움에 하루하루의 삶이 힘겨웠던 일본 강점기에 스포츠 또는 운동이라는 것은 실제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머릿속에 잠시나마 담아두기도 벅찬 일이었을 터다.

광복 이후에도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우리 땅에서는 스포츠가 성장하기 어려운 여건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 선수 양정모가 한국 국적으로는 최초로 금메달을 따기까지는 손기정으로부터 40년이 흘러야 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를 앞둔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서 확실히 자리잡았다.

◇ 나라 잃은 설움…고개 숙인 첫 금메달리스트

우리나라 스포츠 총괄 단체로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등 국제 스포츠 기구에 한국을 대표하는 대한체육회는 1920년 7월13일 창립한 조선체육회를 모체로 한다.

조선체육회는 당시 ‘건민(健民)’과 ‘저항’을 이념으로 설립됐다. 1920년 11월 전국체육대회의 기점인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연 이후 1934년 종목별 경기대회를 통합한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개최했다.

일본 강점기 한국 스포츠의 상징은 역시 마라톤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과 남승룡은 금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거는 기적을 일궈냈다.

 손기정 금메달 낭보는 독립군의 승전보 이상으로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 소식이었다. 20세기를 통틀어 우리나라 체육사에 가장 큰 뉴스라는 찬사도 받았다.

 금메달을 땄기에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 맨 위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던 손기정의 모습은 당시 우리 민족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됐다. 일본 강점기 대표적인 언론 저항 운동으로 꼽히는 ‘일장기 말소 사건’도 손기정의 금메달에서 비롯됐다.

 조선체육회가 1938년 7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면서 우리나라 스포츠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 11월 조국 해방과 함께 조선체육회가 부활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1938년에 함께 해산됐던 각종 경기단체도 함께 다시 새로운 조직을 갖추게 됐다.

 1947년에는 조선올림픽위원회(KOC)가 설립, IOC에 정식으로 가입했고 1948년 1월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은 우리나라가 처음 출전한 올림픽이 됐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선수 3명과 임원 2명을 파견했던 우리나라는 그해 7월 런던 하계올림픽에는 선수 50명과 임원 17명을 출전시켜 동메달 2개를 따냈다.

 한국의 첫 올림픽 메달은 역도 미들급 김성집과 복싱 플라이급 한수안의 동메달로 기록됐다.

 런던올림픽이 끝난 뒤 조선체육회와 조선올림픽위원회는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로 개칭됐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졌지만 우리나라는 1952년 핀란드 헬싱키 하계올림픽에도 출전해 역시 역도와 복싱에서 동메달 1개씩 따내며 선전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폭발적인 성장을 보인 시기다. 1970년대 가장 큰 스포츠 뉴스는 양정모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다. 한국 국적으로 올림픽에서 딴 첫 금메달이다. 사진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미국의 데이비스를 누르고 승리한 양정모.


◇ 프로스포츠 출범과 폭발적 성장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폭발적인 성장을 보인 시기다.

 1970년대 가장 큰 스포츠 뉴스는 역시 양정모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다.

 우리나라는 이 대회 전까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하나도 따내지 못했다. 1936년 베를린 대회 손기정이 우승했지만 이때 손기정의 국적은 일본으로 돼 있었다. IOC 공식 기록에는 ‘기테이 손’이라는 일본식 이름이 여전히 남아있다.

 한국의 첫 올림픽 은메달은 1956년 호주 멜버른 대회 복싱 밴텀급 송순천이 획득했고 금메달은 1972년 서독 뮌헨 대회까지 나오지 않았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 출전한 양정모는 결선리그에서 1승1패를 기록했으나 상대 전적에서 앞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0년대에는 우리나라에 프로스포츠 시대가 열렸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당시 독재 정권의 ‘3S 정책’의 일환이라며 비판하는 시선도 존재하지만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와 1983년 막을 올린 프로축구는 우리나라 체육 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됐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개막 당시 삼성, 해태, 롯데, OB, MBC, 삼미 6개 구단으로 시작한 프로야구는 올해 케이티의 가세로 10개 구단 체제로 확대되면서 한 시즌에 700만 관중을 동원하는 명실상부한 ‘국민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연달아 개최해 한국전쟁을 기억하던 외국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됐다. 사진은 서울 올림픽 개막식.

◇ 잇단 국제대회 게최로 세계적 주목

우리나라가 해방될 당시인 1945년만 하더라도 한국이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과 같은 종합 스포츠 대회를 개최할 수 있을 것으로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은 우리나라가 유치했다가 경제 능력 및 치안 등의 문제로 인해 개최권을 반납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던 우리나라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연달아 개최한다는 것은 1950년대 전쟁터로만 한국을 기억하던 외국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됐다.

 서울 아시안게임과 서울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것은 한국 체육계의 커다란 숙제가 됐고 이 두 대회를 겨냥해 유망주 시절부터 집중 육성을 받은 ‘86·88 꿈나무’들은 우리나라가 세계 스포츠 강국의 반열에 오르는 튼튼한 기반이 됐다.

경기력에서도 우리나라는 86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93개를 따내 94개의 중공(현 중국)을 1개 차로 추격했고 88 올림픽에서는 금메달 12개로 종합 4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몬주익의 영웅’이 된 마라톤 황영조의 금메달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과 우리 민족의 한을 풀어주는 한 편의 드라마가 됐다.



 
한국 스포츠는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이어 2002년에는 일본과 함께 월드컵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거스 히딩크가 지휘하는 한국 대표팀은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4강까지 오르는 쾌거를 이뤄냈다. 사진은 한일월드컵 8강전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에서 승리해 4강에 오른 한국 축구대표팀.


◇ 김연아·박태환 등 스타 플레이어 등장

 한국 스포츠는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이어 2002년에는 일본과 함께 월드컵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특히 한국 축구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2014년 브라질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금자탑을 쌓으면서 ‘아시아 축구 맹주’로서의 자리를 탄탄히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네덜란드) 감독이 지휘한 한국 대표팀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강호들을 줄줄이 물리치며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4강까지 오르는 쾌거를 이뤄냈다.

 또 2010년과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 연달아 실패했던 강원도 평창이 2018년 대회 개최권을 기어이 따내며 우리나라는 동·하계 올림픽과 축구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세계 4대 스포츠 행사로 불리는 대회들을 모두 유치한 6번째 나라가 됐다.

특히 한국은 2000년대 접어들면서 스포츠 지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0년대까지 유도와 레슬링, 복싱, 태권도 등 격투기 종목 또는 축구와 야구 등 단체 구기 종목에서 강세를 보였다면 2000년대 들어서면서 골프와 같은 개인 종목, ‘피겨 여왕’ 김연아로 대표되는 피겨 스케이팅 등 이른바 ‘선진국형 스포츠’에서도 세계적인 선수들이 다수 배출됐다.

 또 아시아 선수는 성적을 내기 어렵다고 여겨진 수영 남자 자유형에서 박태환이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고 ‘부자 스포츠’의 대표격인 모터스포츠의 포뮬러 원(F1) 대회도 국내에서 열리는 등 다양한 종목에서 한국 스포츠의 저력이 발휘되고 있다.

연합뉴스
1990년대까지 유도와 레슬링, 복싱, 태권도 등 격투기 종목 또는 축구와 야구 등 단체 구기 종목에서 강세를 보였다면 2000년대 들어서면서 골프와 같은 개인 종목, ‘피겨 여왕’ 김연아로 대표되는 피겨 스케이팅 등 이른바 ‘선진국형 스포츠’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이 다수 배출됐다. 사진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
해방될 당시인 1945년만 하더라도 한국이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과 같은 종합 스포츠 대회를 개최할 수 있을 것으로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던 우리나라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연달아 개최해 한국전쟁을 기억하던 외국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됐다. 사진은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린 서울아시안게임 개막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Amber 2015-07-08 21:41:32
우리나라를 빛내준 언니, 오빠들 넘 자랑스러워요~~~~ 대한민국 화이팅!!!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