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는 꽃보다 아름답다
열매는 꽃보다 아름답다
  • 경남일보
  • 승인 2015.09.2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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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천 (진해경찰서 경무계장)
금쪽같은 휴일을 빈둥거리며 보내기란 뭔가 밑지는 기분이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맑고 푸른 날엔 더욱 그렇다.

지난 주말, 집사람 손에 끌려 처음으로 거창군의 ‘사과 테마파크’로 향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첩첩산중의 오지에 지나지 않았을 그곳은 지금 억대 연봉의 부촌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란다.

굽이굽이 산모퉁이를 돌다보니 길가엔 탐스럽게 잘 익은 빨간 사과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결실의 계절답게 풍요롭다.

그러고 보니 인간의 원죄를 만든 이브의 사과, 만유인력을 떠올린 뉴턴의 사과, 인생의 경륜을 깨우쳐 준 소크라테스의 사과 등 인류 역사에는 의미 있는 사과들이 꽤 등장했었다.

일전 모 TV 토크쇼에서 소크라테스의 사과처럼 인생의 이치를 다루던 장면이 떠오른다.

한 청년이 “지금 하는 일이 옳고 그른지 판단이 안 설 때는 어떻게 하죠?”라고 묻자 사회자가 답했다. “인생을 더 산 선배의 말에 귀 기울여 보세요. 여러분은 늙어 봤나요? 그분은 젊어 봤어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감 가는 말이다.

몇 해 전 진해의 미군부대를 방문했을 때였다. 70세가 넘는 노령의 군무원에게 ‘이런(경력이 오래된) 분들은 우리 부대의 보물’이라고 자랑하는 젊은 미군병사가 부러웠고, 그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꼬리를 무는 잡념도 떨칠 겸 풀숲에 앉아 스티브잡스마냥 달콤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무는데 다른 일행들의 얘기가 들려온다.

이곳이 조성되기까지 국내 최고의 사과재배 기술을 전수하며 부농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준 공무원이 곧 정년이란다. ‘그분도 이곳의 보배였구나’ 싶은 생각과 함께 머잖아 퇴직이라니 한편으론 아쉽다.

나도 꽃을 좋아한다. 특히 매서운 동장군을 견디고 겨우내 얼었던 대지에 생명의 신비를 자아내는 봄꽃을 누군들 좋아하지 않겠나.

그러나 빨갛게 여문 사과를 겪고 보니 지금껏 느껴온 그 꽃들의 예쁨도 비할 게 못 되었다. 농부의 땀이 배고 인생의 경험이 스며 있는 잘 익은 열매가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걸 이제 겨우 깨달았다.
백승천 (진해경찰서 경무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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