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1)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1)
  • 경남일보
  • 승인 2015.10.1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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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1)

나는 그때 하늘 가운데 있었다. 구름 무리는 어느새 끝없이 활짝 핀 갈밭으로 바뀌어 있고 비몽사몽간 인 듯싶은데 야아옹, 야아아 옹옹옹.... 떼 몰려서 달려와 가슴을 치며 안기는 고양이 때문에 문득 눈을 떴다. 이게 무슨 징조인가. 고양이들의 남루한 꼬락서니를 되새겨 볼 틈도 없이 덜컥, 착지로 인한 요동도 그 순간 일어났다.

비행기가 드디어 공항에 안착했다. 긴 활주로 위로 미끄러지듯 굴러가는 바퀴의 흐름을 전신으로 받아들이는 동안 가슴의 동계가 사뭇 쿵쾅거리며 고조되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인데. 나이 든 어른들은 그랬다. 나는 거기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꼭 지켜야된다고 고집할 수 있는 가치는 과연 몇 가지나 될까, 덧붙이고 싶다. 남 눈에는 하찮게 보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엄청 큰 무게이고 고통이었을 삶의 멍에를 지고 허위단심 헤쳐 나온 사람들, 특히 그 시절의 여인들..... .

나, 수연은 귀국전시회가 끝나고 나면 최호남 이모가 설립한 ‘자매유아원’의 원장이 될 것이다. 취임하면 첫 번 째로 내가 할 일은 ‘자매유아원’ 이름부터 ‘이모유아원’으로 개명할 것이다. 설립의 근간이 된 선배들의 거룩한 사업에 대한 후배의 현창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방대한 터전을 거느리고 이모 유아원이 설립되기까지의 내력을 구전이나 기록 등을 참고해서 밝혀 볼 참이다.

내가 운영하게 될 유아원을 처음 둘러보면서 내가 느낀 감상은 묘했다. 내가 명색 화가라는 직함을 갖게 된 것도, 한 쪽 팔이 짧은 선천성 기형의 장애를 조금도 불구감 못 느끼게 길러진 것도, 모국어도 핏줄도 까맣게 모르는 입양아가 되지 않은 것도 다 이모들 덕분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났을 그때만 해도 그루터기 사납게 버티고 있던 남존여비에 저항하며 일생을 바치다시피 해 온 나의 이모 들. 특히 ‘최강양지’ 라는 다른 이름을 고집하며 살았던 최쾌남 다섯 째 이모는 ‘고아수출국’ 이라는 국가적인 오명을 덧칠하지 않기 위해 작은 실천으로나마 나를 지켜주었다.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많은 것을 희생한 이모에 대한 나의 안타까움과 존경심은 한층 배가된다.

고구마 줄기를 잡아당기면 주렁주렁 달린 고구마가 딸려 나오듯 쾌남, 다섯째 이모를 비롯하여 그 주변 신구(新舊)여성들의 한 많은 인생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예를 들자면 이모 자매들 이름에는 모두 사내 남(男)자가 들어있다. 많은 남손을 필요로 한 할아버지의 엄명이었다. 그러나 줄줄이 열 명이나 이모만 태어났다. 개화기의 밝은 빛 속에서도 백골수마냥 더욱 강건하게 버텨 온 남존여비 사상의 여파 때문이었다. 인습과 무지로 박해받은 여성들의 자기 정체성을 향한 줄기찬 노력은 여성들 스스로도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소위 ‘여성상위시대’ 라는 속어가 만들어질 정도의 변화에 이르도록 그들은 신음하며 가파른 길을 달렸다. 좁은 가족사로나마 20세기 어우름의 격랑 속에 서있던 여성들의 잔혹사를 조명해 보는데 의의를 둔다. 기형의 불구인 나도 활짝 핀 문명 시대의 빛을 보면서 살 수 있는 오늘의 터전은 그들 이모들이 영육을 태워서 만든 옥토이므로 사명감까지 더해진다.

나를 통해서 현신하고 싶은 여인들의 환영이 아우성치듯이 줄을 서있다. 대방마님에 의해 도륙 당하듯이 자취를 감춘 삼월할머니를 비롯하여 언양할머니, 고모할머니, 큰이모 성남과 나의 엄마 최정남.

나 수연이 굳이 다섯 째 이모 ‘최쾌남’의 궤적을 따르는 것은 나를 지켜준 은인이며 버려진 아이들의 요람인 유아원 설립을 간절히 염원하여, 자금원인 여덟 번 째 ‘호남이모’의 뜻을 움직였던 장본인이었음에 바탕을 둔 것이다.

호남이모가 보낸 승용차에 오르면서 또 그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그 언덕에 앉아 자매유아원을 내려다보고 계실까. 자매유아원에 대한 그 분의 감상 또한 남다르게 아프고 복잡한 역사일 것이다. 백세 가까운 할아버지가 하필 그 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은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설치해 놓은 조형물처럼 보여서 더욱 아이러니다. 검버섯이 숭숭 뒤덮인 얼굴은 볕에 노출되어 지내는 하루 일과를 증명하듯 거칠고 꺼먼 주름으로 뒤엉켜있는데 상처 난 자국으로 진액이 흘러내리는 오래 된 참나무나 소나무들을 떠올리게 되곤했다. 그러나 맛난 간식을 핥기 위해 눈 주위로 빙빙 꼬이는 파리를 ㅤㅉㅗㅈ느라 파리채처럼 간간이 손을 휘두를 때면 아직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당찬 거수를 보여주는 것 같아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늘 거기 앉아있는 할아버지를 만나러 몇 번 언덕을 올라간 간적이 있다. 이모들이 애쓰지 않았다면 양자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모래알처럼 흩어진 세계 각처에서 외롭고 불쌍하게 야윈 영혼을 끌어안고 전전긍긍 살아갈 아이들. 보육원 뜰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의 심중에 대한 감상이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자신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본 할아버지가 변명의 기회도 거부한 채 먼저 자리를 떠버리는 바람에 애석하게도 그런 기회는 잡히지 않았다.

유난히 파리가 꾀어들던 눈물샘은 아직도 마르지 않은 채 늙은 눈시울을 꾀죄죄하게 적시고 있을까. 그 눈물에 담긴 어떤 맛에 대해 파리는 어떤 정의를 느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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