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재 여행] 함안 무기연당
[경남 문화재 여행] 함안 무기연당
  • 여선동
  • 승인 2015.08.3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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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벗 삼은 조선 연못의 정수
▲ 칠원읍 무기리 무기연당

자연에 묻혀 살고자 한 이름 무기(舞沂)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에 있는 무기연당의 이름 무기(舞沂)는 무우의 무(舞)와 기수의 기(沂)를 합친 글자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학문을 즐기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증점의 욕호기 풍호무우(浴乎沂 風乎舞雩)를 그대로 실천한 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 1681~1743) 선생이 자신의 연못에다 붙인 이름이다.

주재성 선생은 조선 영조 4년(1728)이인좌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난을 진압한 인물. 관군은 돌아오는 길에 그의 덕을 칭송하여 마을입구에 창의사적비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고 산의 모양을 본떠 놓았다. 연못가에는 후대에 풍욕루와 하환정을 지었고 최근에 충효사를 지었다. 연못 주위에는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어 영귀문이 있다. 무기연당 연못은 국가지정 문화재로 1984년 12월 중요민속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됐다. 주씨 고가는 1985년 1월 경남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됐다.

주재성 선생은 조선 후기의 혼탁해져 가는 세상을 보면서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에 묻혀 지냈다.

선생의 선비정신이 살아있는 무기연당은 조선후기 사대부 집안에 꾸민 연못의 정수를 보여주는 백미로 정원문화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로 백운동 서원을 세우고 인삼을 재배하신 것으로 유명한 주세붕의 종손자(형인 주세곤의 손자)인데 증조할아버지인 주문보가 칠서면 무릉리에 처음으로 정착해 무릉도원처럼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을 무릉(武陵)이라하고, 자신이 정착한 마을도 자신의 사상을 담아 무기라고 이름을 지었다.

바람에 몸을 씻는 집 풍욕루(風浴樓)

연꽃은 군자를 상징하니 곧 선비의 정신이 거기에 배어있다고 보는 것이며 그래서 연못에 연꽃을 심은 것이다. 무기와 연당, 선비와 군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그 이름만으로도 잘 보여주고 있다. 무기연당 경내의 동북쪽 모퉁이에 풍욕루(風浴樓)는 바람에 몸을 씻는 집이라는 이름으로, 풍욕의 욕은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떨어서 입는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세상의 혼탁함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깨끗이 유지하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풍욕루는 선생이 뜻을 같이 하는 여러 선비를 초청해 함께 시를 읊고 글을 짓는 곳이었다. 바람에 몸을 씻는 집. 그래서 마음까지도 정갈해지고 맑고 취하지 않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곳. 선생의 고고함이 그 이름에서도 살아있다.

또 풍욕루의 마루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면 오랜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소나무가 무기연당의 물 위에 비스듬히 서 있고 그 아래에는 무기연당의 맑은 물에 손을 넣을 수 있는 탁영석(濯纓石)이 있다.

씻을 탁, 갓끈 영, 돌 석이니 곧 갓끈을 씻는 돌이다. 어부가 굴원에게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는 법이라고 했는데 무기연당에 탁영석을 놓은 것은 무기연당의 물이 맑다는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요체가 배어있는 풍욕루와 탁영석에서 굴원을 생각하며 이소(離騷)의 한 구절이다.


날이 새면 저 맑은 백수를 건너,
낭풍산에 올라 말 매고 쉬랬더니,
가다가 돌아보며 흐르는 눈물,
아! 이 산에도 미녀는 없네.

 

◇은둔의 삶을 노래한 하환정(何換亭)과 국담(菊潭)=무기연당의 북쪽에는 하환정(何換亭)이 있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이고 연당 쪽으로 난간을 설치했는데 마루는 높지 않고 홑처마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이다. 풍욕루가 댓돌을 높이 쌓고 앞뒤퇴가 있는 3칸 규모인 것에 비해 다소 소박하지만 오히려 그 소박함이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하는 마음을 더욱 잘 표현하고 있다.

하환정 중수기에 의하면 국담(菊潭)은 1717년에 만들어졌는데 마당에 연못을 파고 고기를 기르는 곳으로 나와 있다. 연못 안에 봉래산을 연상시키는 석가산(石假山, 돌을 쌓아 산처럼 만든 것)을 쌓은 다음 이를 양심대(養心臺)라 하였으며 담장을 쌓고 출입하는 문에는 영귀문(詠歸門)이란 현판이 있다.

연못을 보면 네모나게 못을 만들고 그 안의 섬은 동그랗다. 이것은 우리나라 고대의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연못의 외곽 석축을 네모나게 쌓고 연못의 석가산은 둥글게 쌓아 올렸으니 그래서 하늘과 땅을 담은 국담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양심대 아래 바위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을 새겼는데 오랫동안 부는 맑은 바람은 곧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선비가 지닌 절개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선비의 철학을 다짐한 것이다.

1743년 주재성 선생이 돌아가자 영조는 3년 뒤인 1746년 주재성 선생의 아버지 주각에게 ‘지평’, 선생에게는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천관’을 추증하고, 또 영원히 주재성 선생의 위패를 옮기지 말라는 불조묘(
不祧廟)를 내린다. 이 불조묘는 현 무기리 주씨고가 뒤에 세워져 있다.

1783년 영남유생의 상소로 정려를 받고 1788년 무기연당이 있는 뒷산 아래의 기양서원(沂陽書院)에 배향되었으나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고 1971년에 세운 충효사(忠孝祠)가 무기연당의 남쪽에 서있다.

주씨고가의 대문은 보기 드물게 솟을삼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1783년에 주재성 선생에게 내려진 충신 정려와 그 아들 주도복 선생이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목숨을 연장케 해서 1859년에 받은 효자 정려를 합친 충효쌍정려문으로서의 위상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서 두 정려가 나란히 걸려 있다.

주도복 선생의 호는 감은재(感恩齋)인데 부친에게 벼슬을 내린 영조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호를 짓고 또 같은 이름으로 서실(書室)을 지었는데 주씨고가의 사랑채로서 현존하고 있다.

여선동기자 sundong@gnnews.co.kr

 
무기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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