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6)
  • 경남일보
  • 승인 2015.10.1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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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6)


그러나 막상 그쪽에서 제의하는 자리인데도 그녀는 선약을 핑계로 사양을 했다. 예외 없이 앞을 가리는 선명하지 못한 색채. 조건이 좋은 남자의 손길에 이끌려 밥을 같이 먹고 차를 마시고, 드디어는 그와 한 방을 쓰게 되고- 자식을 낳아 기르고 결국 노파가 되고…. 말대로 그렇게 살면 일생은 평범하게 마무리 될 것이다. 그러나 인생길은 하나 뿐 여분이 없다. 한 길을 선택하는 순간 다른 길은 접어 버려야한다. 호적장부에 누구누구와 짝을 이룬, 그 하나의 흔적, 고작 그 하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 그녀가 아는 생의 과정은 너무나 첩첩하고 고통스러웠다. 남들 다하는 그 아프고 허탈한 소모전으로 이 귀한 인생을 탕진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과감하게 고개를 외로 돌렸었다.

또 찬란하게 터져 오르는 파티장의 화사하고 충만한 웃음소리를 그녀는 조마스러운 심정으로 들었다.

[이제 이거 네가 보관할 차례야]

파티 장을 나왔을 때 양지는 정아에게 사물함의 열쇠를 넘겨주었다. ‘우먼파워’의 비밀 상자를 보관해 놓은 데였다.

[이거 내가 가져가면 뭐하니. 보나마나 우리 모임도 날 샌 것 같은데]

[누가 그래 날 샜다고!]

[큰소리치는 너부터 조짐 심상찮은 거 모를 줄 알고?]

정아의 일침이 따끔하게 날아왔다. 천만에, 나는 아니야. 양지는 속으로 뇌까렸지만 이제 조직의 모든 내부는 흩뜨려졌는데 텅 빈 껍데기만 움켜쥐고 앙앙대는 꼴 더 보이기 싫어 열쇠를 넘겨주는 심정도 사실은 허탈했다. 정아도 금속의 조밀한 요철을 손가락 끝으로 잠시 만져본 뒤 가방 깊숙한 곳의 작은 지퍼를 열고 열쇠를 넣었다.

수연의 육아 비를 지불해야 되는 날이지만 양지는 곧바로 자취방으로 향했다. 시간이 늦은 탓도 있지만 아무도 만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놓고 걱정 없이 유학을 떠나는 친구를, 홀아비 생활도 외롭고 성가실 텐데 육아와 가사까지, 더구나 학위가 끝날 때까지 아내의 용돈까지 보내야 하는데도 마냥 허허거리던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순화남편의 행동만이 뇌리에서 맴돌았다.

추 여사의 전화도 묵살했다. 겉으로는 반찬 가져가라는 채근이지만 실상은 병훈과의 관계를 다잡으라는 부추김일게 분명했다. 그것을 견제하듯이 잇달아서 현태한테서도 전화가 왔다. 놀랍게도 정남이 딸 수연의 양육비 전달을 확인했다. ‘여자애들은 개나리색이 잘 어울린다며?’ 옷도 한 벌 사놓은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덧붙여서 지나가는 말처럼 고향에서 어머니가 오시겠단다는 말도 전했다. 선을 보러, 네가 점찍었다니 괜찮은 며느릿감인지 확인을 하겠다는 것이다. 양지는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었다. 용납할 수밖에 없는 순서인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현태의 어머니라는 거목 아래 작은 나무처럼 초라하게 서 있어야하는 자신의 위치가 인사치레지만 답답해서 싫었다. 비교되고 또 남을 의식하면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도 번거롭고 원하지 않는 짓이었다.

다 귀찮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 이불 속에 깊이 묻히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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