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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62)<122>2015년 남강문학회에서 만난 문인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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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25  19: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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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기, 10월 23일 오후 6시 서울 ‘예술가의 집’에서는 계간 ‘미네르바’의 신인작품상과 미네르바 예술아카데미상 시상식이 개최되었다. 필자는 신인상 심사평을 하기 위해 자리를 같이했는데 문효치 대표는 예술아카데미상 수상자에 대한 평을 하면서 “수상자 박수중 시인은 강희근 교수가 말하는 바대로 한다면 ‘후문학파’에 속하는 분입니다. 후문학파란 ‘선인생 후문학파’의 준말입니다. 그는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은행가에 몸담았다가 이제 물러나 풍부한 삶의 경륜을 시정에다 담아내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필자는 다음번에 올라가 “여기 신인상 수상자들은 선문학파들입니다.”하고 심사평을 했는데 평이 끝난 다음 자리에 앉으니 옆자리 있던 유안진 시인이 귓속말로 “‘후문학파’라는 이름이 아주 멋지고 맞는 말이예요. 앞으로 그 이론을 널리 펼쳐나가는 것이 문단을 위해 좋을 것 같아요.”하고 필자를 응원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남강문학회 회원들은 대개가 후문학파들이기 때문이다. 남강문학회에서 만난 문인들 이야기 중 한영탁 수필가에 대해 지난 회에서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에게 필자는 동국대학교 61학번 영문학과 한정실씨를 아느냐고 물었고, 그는 그 한정실씨는 졸업후 미국에서 10년간 있었고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이후는 동창회에 동정이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한정실씨는 필자와 재학중 동국대학교 교내방송국 국원으로 같이 활동했던 학생이라 안부가 궁금했었다. 한정실씨를 아는 한영탁 수필가가 괜히 좋아져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한영탁 수필가는 남강문학회원들 중 유일하게 남강물을 마시고 성장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1956년 부산 동아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11월에 개최된 개천예술제 백일장에 참가하여 낙방했다. 그때 장원은 진주고등학교 성종화였다. 당시는 초중고 대학일반 구분없이 심사하여 장원을 매겼던 때여서 성종화의 장원은 권위가 높았었다. 그 사이 전국에서 모인 백일장 참가자들 중에 공통분모가 같은 사람들끼리 통성명을 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나오는 ‘학원’ 잡지에 시를 응모하여 실리고 상을 받고 하는 이른바 학원파들이었다. 제주에서 온 김종원(시인, 영화평론가), 부산에서 온 한영탁(수필가 번역문학가), 진주에서 진주사범의 정재필, 진주고교의 허일만, 성종화 등이 합류하는 일시 모임이 이루어져 하루밤 진주의 어느집에서 밤을 지새며 문학을 논했다. 그날 저녁 이들은 백일장에 써낸 자기 작품을 낭송하는 차례를 마련했다.

이때 만난 사람들은 일부 문인이 되어 활동하기도 하지만 50여년 잠수하다가 각기 개별적 계기로 문단이라는 곳으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그 이후 연락이 되어 남강문학회에서 이산가족처럼 만나 문학이라는 같은 배를 타게 되었다. 남강문학회원들은 그런 의미에서 진주와 진주남강이 정서와 추억의 공간으로 그들에게는 곧 문학의 대명사와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영탁 수필가는 동아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을 못하고 군에 입대했다. 제대후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에는 동기생들 보다 3년이나 늦게 다녔다. 그는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을 수료했고 조선일보,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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