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9)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9)
  • 경남일보
  • 승인 2015.10.1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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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9)

양지는 털어 버리듯 그들의 환영을 밀어내며 울퉁불퉁 생흙이 드러난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좁지만 정겹던 옛날의 분위기를 앗아가고 들쑥날쑥 뚫리고 막히고 넓어졌다가 갑자기 좁아지기도 하면서 어수선한 개발바람을 타고 있는 언덕길. 갯바위에 붙어사는 따개비처럼 그 조악하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의 힘찬 근성은 끈질긴 저력으로 스스로의 나날을 만들어 간다.

막다른 골목으로 가쁜 가쁜 접어들 때였다.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비디오가게의 문이 열리며 때마침 나오던 누군가가 반색을 하며 말을 걸었다.

[어머, 지금 오세요?]

듣기에 따라서는 사뭇 힐난조의 억양이다. 가게에서 쏟아지는 역광을 비켜서며 돌아보니 옆방 새댁이었다. 고약한 말투 군. 결혼만 먼저 했다고 어른은 아닐 텐데. 불쾌함을 누르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또 얼마나 시시덕거리며 남까지 잠을 설치게 할는지. 새댁의 손에 들린 서너 개의 비디오테이프로 양지의 곱잖은 시선이 뻗어갔다. 새댁을 앞서 가거나 양보를 하거나 해야 될 지점에서 양지가 보폭을 고르는데,

[할아버지가 진작부터 와서 기다리는데·····]

새댁이 그랬다. 막 계단 위로 올려놓던 양지의 발이 굳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여기는 순간 마치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한 충격이 일었다. 곁에는 둘 말고 다른 아무도 없었다. 양지는 굳어진 자세대로 새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친절하게도 옆방 새댁이 덧붙였다.

[고향…, 진주에서 오셨다던데요]

조잘조잘 새댁이 늘어놓는 인상착의. 안경을 꼈고 한 쪽 눈이…….

양지는 어금니에 힘을 주면서 고개를 비틀었다. 깊이 모를 수렁으로 꺼져 들어가느라 지금 자신의 몸뚱이가 지표 밑의 허공에서 디룽거리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나타난 언니, 언니는 결코 그저 보인 것이 아니었다. 왠지 불길함을 끼얹으며 티눈처럼 박혀있던 의문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언니는 무슨 말인가를 외치기는 했지만 양지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언니는 사슴이었다. 형상은 보이지 않는데 다급한 발자국소리만 들렸다. 그게 언니라 했다. 죽음을 향해 산기슭을 치달려 가던 그날처럼 마른 황토 위에서 타닥거리는 빠른 발자국 소리가 뇌리를 가득 채웠다. 쾌남아, 쾌남아. 피가 지듯 외치던 이름만이 애절한 여운이 되어 양지의 의식을 휘몰아 쳤다. 쫓기는 언니를 무작정 따라 뛰었으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애쓰며 허우적거리는데 땡, 땡, 땡, 아련한 소리가 의식의 뿌연 막을 뚫고 들어왔다. 눈을 떠보니 허무한 안개자락을 끌며 새벽이 창밖까지 번져 있었고 희윰한 들창 아래서 청소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었다.

마음의 지주 하나 꿋꿋하게 세우지 못했던 시절에는 밤마다 언니가 꿈에 보이기를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곤 했다. 너는 언니만 믿어. 생전처럼 그런 말을 해서 용기를 북돋는 것도 아니었지만 언니를 꿈에서 본 날은 꼭 무슨 징조가 있었다.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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