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위식의 발길닿는대로 (74) 지안재와 오도재
윤위식의 발길닿는대로 (74) 지안재와 오도재
  • 경남일보
  • 승인 2015.10.2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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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구비 지안재 오르막길에서 계절을 보낸다
 
24번 도로를 따라서 야트막한 두재를 넘었더니 금방 ‘지리산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좌회전을 하면 오도재다.


때 이른 된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볕이 들면 생기를 되찾겠지만 이른 아침의 작은 화단에는 홀로 남은 국화가 시들하다. ‘오상고절이 너뿐인가 하노라’고 고결한 지절과 추앙받던 충절에 비유되던 국화가 밤이 길어서 외로웠을까, 달빛이 차가워서 서러웠을까, 여명 짙은 새벽을 안고 몸부림을 쳤을까. 송이가 자잘한 노란 국화가 하얗게 서리를 맞고 고단한 몸짓으로 햇살을 기다리는 간절한 염원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다. 망국의 한을 달래며 성황당에 돌을 쌓던 가락국의 마지막 황후 계화부인의 발자국마다 설움이 겨워서 피어났던 산국화가 지금쯤 하얀 된서리를 녹이고 있을 등구마천 오도재가 불현듯 생각나서 길을 나섰다.

함양읍에서 팔령을 넘어 인월과 남원으로 이어지는 24번 도로를 따라서 야트막한 두재를 넘었더니 금방 ‘지리산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좌회전을 하란다.

구룡천을 건너 조동마을회관 앞을 지나니까 완만한 경사의 비탈길이 시작되고 이내 굽이진 지안재 오르막길이 구불구불 휘돌아져서 마치 도솔천에라도 들어 갈 것 같은 기분이다. 고갯마루에 작은 조망대가 있어 돌고 돌아 오른 길을 내려다보니 한눈에 들어오는 굽이진 길이 참으로 아름답고 멋스럽다. 건너다보이는 산은 드높아서 하늘에 닿았고 골짜기를 따라서 굽이돌아 오르면 또 한 굽이가 이어지고 있어 굽이굽이 살아가는 인생사 같아서 만감이 휘감는다. 인생사 굽이진 삶도 이처럼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으련만 아등바등 해봤자 턱걸이로 바동대고 죽기 살기로 뜀박질 해 봤자 뱁새걸음이라 먼 길 앞에 두고 해가 먼저 저무는데 돌아보면 설움이고 생각하면 허무할 뿐 부질없는 각축으로 인정만 소홀했다. 왔던 길을 돌아보아야 갈 길이 분명하다. 지안재는 고갯마루에 닿으면 기어이 돌아다보게 하는 깨달음의 고개이다. 굽이굽이 휘돌아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지안재를 넘어서자 바깥세상을 까마득히 멀리하고 오로지 하늘만 열려있는 첩첩산중이다.

가던 길은 오도재를 향해 다시 구불거리며 비탈로 이어지고 길섶의 계곡은 깊숙이 암반을 깔고 내려앉았는데 가뭄과는 아랑곳없는 계곡물은 용하게도 바윗돌을 빗겨가며 소리 내며 흐르고 곱게 물든 낙엽은 시나브로 날아와서 길동무를 자처한다. 몇 해 전의 동동주 맛을 못 잊어서 쉬어 갈까 했던 변강쇠와 옹녀의 주막은 이미 폐업을 했는지 닫힌 출입문은 자물쇠가 매달렸다. 덩그러니 주마등은 객을 홀로 반기건만, 첩첩산중 깊은 골에 너 홀로 나 홀로라, 오도재 넘어 가는 뜬 구름도 무정하다. 주안상 앞에 놓고 객이라도 마주 앉아, 세상사 멀리하고 시름 풀고 회포 풀며, 삼봉산 끝자락에 회한의 눈물 닦고, 불계의 산문 앞에서 번뇌 전송 하려는데, 주막은 빈집이고 주마등만 홀로 섰다. 푸념석인 넋두리로 주마등과 하직하고 가던 길을 재촉하여 비탈길을 오르는데 목장승들이 떼를 지어 퉁방울 같은 눈을 부라리고 잔말 말고 오르기나 하란다.



 
오도재 고갯마루에 2차선 도로를 가로막은 ‘지리산제1문’ 이라는 편액을 단 문루가 성루처럼 웅장하다.


변강쇠가 떠나가선지 장승들의 기세가 가당찮다. ‘이 벅수들아! 바깥세상이 얼마나 힘 드는 줄 알기나 하나, 지나간 사실이 역사인데 역사교과서국정화문제로 가타부타 시비하고 공무원연금법은 변죽만 울렸지 애먼 사람 등골 빼기는 매 한가지고 청년실업해소는 듣기 좋은 꽃노랜데 뭐가 좋아서 턱이 빠지도록 입 벌리고 우쭐거려!’ 호되게 한 소리하고 싶은데 주차가 마땅찮아 훗날로 미루고 한 굽이를 더 오르니까 해발 773m의 오도재 고갯마루에 2차선 도로를 가로막은 ‘지리산제1문’ 이라는 편액을 단 문루가 성루처럼 웅장하다. 아래로는 주차장과 휴게소를 겸한 전망대가 야외무대와 정자까지 마련하고 널따랗게 자리를 마련했다. 석축으로 조경을 한 군데군데에 자연석을 깎아 세워 점필재 김종직선생을 비롯하여 일두 정여창, 뇌계 유호인, 탁영 김일손, 보한재 신숙주 등 선현들이 남긴 지리산의 풍광을 읊은 한시가 우람한 빗돌로 서서 옛 정취를 일러준다.

삼봉산과 법화산이 손을 맞잡은 고갯마루 오도재. 번뇌를 벗어 놓고 불계로 들어가는 관문이 오도라 했건만 옛사람들이 고달픈 삶을 이고지고 넘고 넘던 고난의 고개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설움을 달래며 넘고 넘었던 눈물의 고개였다. 등짐장사가 넘고 가마꾼이 넘고 소박데기가 울고 넘던 한 많은 고개이기도 하지만, 남해와 하동의 해산물이 장터목이나 벽소령을 넘어와 오도재를 넘어서 함양을 거쳐 내륙으로 운송되던 삶의 교역로였으며 임진란에는 서산대사가 승군을 이끌던 군사적 요새였고 6.25때는 지리산 방어선이기도 했었지만 먼 옛적엔 가락국의 마지막 구형왕과 황후인 계화부인이, 오백년 도읍지의 구중궁궐 비워주고 만조백관 어진백성 눈물로 하직하고 적막한 첩첩산중 ‘세석대골’로 찾아들어 후일을 도모하려 궐을 지어 은거하며 계화부인은 매일 같이 오도재로 올라 멀리 천왕봉을 향해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선왕들의 명복을 빌고 빌던 성황당 고갯마루다.

문루에 올라 바라보는 전후 풍광은 겹겹의 산과 산이 하늘까지 끝이 없어 많고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도 흔적이 없어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선 기분이다.

문루를 내려서자 ‘오도산령신지위’라 새긴 비를 모신 산령비각이 높다란 석축위에서 지리산 70리 능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어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추는데 계화부인의 북받치는 눈물인지 쉬어가는 먹장구름에서 ‘후두두둑’ 하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는데 샛노란 산국화도 고개를 숙인다.

지리산제1문을 통과하여 구형왕이 왕산으로 몸을 피해 비워진 ‘빈대궐’ 옛터인 등구사를 찾아서 내리막길로 내려서는데 지리산 조망공원의 널따란 주차장은 휴게소와 정자를 마련하고 길손들을 반긴다. 정자에 오르니 일망무제의 광활한 천지를 지리산의 주능선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장엄한 풍광에 가슴이 벅차다.

‘빈대궐’ 옛터의 ‘등구사’를 찾아 촉동마을로 내려가서 작은 표지판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길을 더듬으며 경사가 심한 오르막길을 차고 올랐다. 옛 내음이 나는 이끼 낀 높은 석축이 커다란 바윗돌을 아귀 맞춰 배수구의 출구인지 토굴의 입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꽤나 큼직하게 구멍을 낸 석축위로 석탑이 앉았는데 2중의 기단 위로 상대석과 상대옥석이 1층 탑신을 받히고 위로는 옥개석뿐인데 당초엔 3층 석탑으로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경남도문화재자료 제547호란다.

낙락장송이 굽어보는 빈대궐 옛터에는 간이 인법당과 요사뿐인데 언덕배기에 단청을 입힌 작은 산신각이 인담스님의 등구사 복원불사를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등구사의 흥망성쇠인들 누가 알랴만 ‘등구사사적기’와 고문헌들이 있다하니 사학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가파른 길을 새로이 개설하는 작업이 한창이라서 천년의 흔적이 지워질까 염려된다. 멀리 지리산 주능선이 천왕봉의 좌로는 중봉과 하봉이 그리고 우측으로는 반야봉까지 길게 뻗어 하늘높이 장엄하다. ‘빈 대궐’의 옛 흔적은 간 곳이 없어도 동찰 서찰 대가람의 등구사 옛터에서 중생제도의 독경소리가 천왕봉 능선타고 사바세계로 여울지길 간절히 염원한다. 나무관세음보살.



 
낙락장송이 굽어보는 빈대궐 옛터에는 간이 인법당과 요사뿐인데 언덕배기에 단청을 입힌 작은 산신각이 인담스님의 등구사 복원불사를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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